아구를 아구아구
한겨울의 어느 저녁이었다. 진눈깨비가 질척하게 날렸던 날, 지하의 어느 전문점에서 아구 수육을 먹었다. 부산에서 생물 아구를 경매로 받아 올려 낸다는 곳, 그래서 어장의 조건 탓에 재료를 받을 수 없으면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곳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재료는 훌륭했다. 가운데에 쌓인 간도, 주변을 둘러싼 살도 부드럽고 신선했다…
…먹을 수 있는 부위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많지 않았다. 거하게 담아낸 접시에 비해 양이 적어서 불만이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양이 이래도 저래도 상관이 없었다. 다만 생각보다 먹을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으며, 그게 전혀 먹을 수 없는 부분과 지나치게 섞여 있어서 문제였다.
생긴 걸 보면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듯, 아구는 사실 먹을 수 있는 부위가 많다고는 볼 수 없는 생선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연골이다. 이를 그냥 구분 없이 토막 쳐 놓으면 아주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살조차도 모험에 가깝게 공을 들여 먹어야 한다. 왜 모험인가? 먹을 수 없는 부위가 크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소주를 곁들여 아구를 먹으며, 나는 일행에게 ‘이런 아구를 먹다가 발생한 사고에 대한 기사를 읽어본 기억은 없는데, 과연 전혀 없을까?’라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건넸다. 실제로 나는 이날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술이 적당히 들어간 상황에서 지느러미 등을 먹다가 굵은 바늘 같은 가시를 잘못 삼키거나 한다면 대체 어떻게 될까? 오르토랑의 뼈도 아닌데 수직으로 세워져 입천장을 찌른다면? 어떤 사고라도 벌어질 수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음식점도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닌지 가위가 딸려 온다. 그러나 아구의 먹지 못하는 부위는 가위로 대충 해결할 수 있는 성질과 거리가 멀다. 설사 날카로운 지느러미 등을 잘라낸다고 해도 나머지는 여전히 질긴 동시에 미끈거린다. 극복할 수 없는 물성인가? 그렇지는 않다. 푹 끓이면 좀 더 흐물흐물해져서 굳이 먹겠다면 적당히 빨아서 씹는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너나 구분 없이 토막을 친다면 그런 조리는 불가능하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부드러운 살이 연골 사이에 묻혀 완전히 부스러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음식점이 이를 인지하고 살만이라도 과조리 전혀 없이, 부드럽게 익혀냈다는 사실만은 긍정적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그러기에는 1인 2.5~3만원대의 비용이 걸린다.
”아구를 아구아구’라니 무슨 말장난이냐?’ 싶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생선의 이름이 아구이다. 이를 거대한 접시에 푸짐해 보이도록 담아낸다. 그럼 왠지 정말 ‘아구아구’ 먹어야 맥락에 잘 들어 맞고 즐거울 것 같다. 심지어 표준어인 ‘아귀’로 대체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실제로 먹기 시작하면 맨 위에서 언급했듯 양을 문제로 삼지 않더라도 실제로 ‘아구아구’ 먹기는 매우 힘들다. 주방에서 채 시작도 하지 않은 ‘배틀’을 식탁에서 아구와 힘들여 벌여야 하는 느낌이랄까.
아구아구 먹고 싶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젓가락을 들면 그럴 수 없는 형식의 음식. 그리고 그런 형식과 기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갈등. 현재 한식의 범주 안에 있는 많은 음식이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의 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머리부터 꼬리까지 먹기’가 동물 또는 식재료를 존중하는 접근인 가운데, 오직 저작 활동만이 ‘먹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런 음식에서 때로 나는 대부분이 크게 자각하지 못하는 일종의 가식을 감지한다. 이런 음식을 통해 우리는 빠짐없이, 다양하게, 혹은 편견 없이 먹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사실은 ‘먹기’라는 행위 자체를 그저 저작으로만 국한 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객이 아닌 요리사가 디테일을 도외시한 음식이 한식에 너무 많죠.
잠재력은 풍부한데…재료가 좋으니 조리방법이 단순한 건 좋은데, 투박하니 먹기가 번거로운 음식이 많습니다.
제가 생선이나 갑각류 요리를 즐겨먹지 않는 이유는 번거롭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