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회의
수산시장의 상징이 고래라는 사실에 회의를 안 품을 수 있을까? 포유류인데다가 지구 차원에서 포획이 금지된 동물 아닌가. 평소라면 이런 동물이 말도 안되는 진입로-정말 너무나 말이 안되는-를 거쳐 시장 앞에 이르렀을때 나를 반기고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절망할 수 있다. 생각이 그렇게도 없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시장 안에 발을 들이면 절망할 건덕지는 차고 넘치니까.
무엇이 그렇게 절망스러운가.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현대화가 절망스럽다. 과연 누구와 무엇을 위한 현대화인가. 공간만 바뀌었을 뿐 그 외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죽은 생선은 죽은 대로, 산 생선은 산 대로 거칠게 취급 당한다. 죽은 생선은 여느 재래시장과 별 다름 없는 환경에서 누워 있고, 산 생선은… 지옥 속에서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인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수준이라면 차라리 죽어 시장에 들어오는 생선이 더 행복할 지경이다. 수산시장과 활어회는 온갖 동물복지의 담론이나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수조에서 생선을 건져 올려 바닥에서 갈고리로 아가미를 찍어 죽여서는 그대로 회를 뜬다. 이미 죽은 생선-예를 들자면 요즘 제철이라는 대방어-은 피가 배어나온 살을 파르르 떨며 진열대에 방치되어 있다. 동물복지가 궁극적으로는 품질 개선을 통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인간에게 이로운 일종의 안전장치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식의 방기나 방치가 먹는 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나는 ‘활(活)’을 향한 집착과 탐욕을 이해할 수가 없다. 육지동물이라면 과연 이런 식으로 소비할 수가 있을까. 소나 돼지는 너무 크고 징그러워서 식욕이 떨어질까? 그럼 닭은 작으니까 괜찮을까? ‘닭장차’ 같은 어휘는 비유로 흔히 쓰일 정도로 문제의식이 공유되는 현실인데, 그와 별 다를 바 없는 시장의 수조는 괜찮은 걸까?
생선을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것도 한편 상상력이나 공감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비린내가 나는 뻘건 피를 흘리며 내장을 쏟아내거나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두지 않는다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 활어회라는 식문화의 어디에 전통 대접을 받을 만한 섬세함이나 지혜 같은 것들이 깃들어 있다는 말인가. 비늘 한 쪽 만큼도 없다. ‘보신탕’ 문화는 애초에 음성적인 유통이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다. 활어회는 아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몬도가네의 아수라장을 묵인해주는 원동력은 불감증이다.
어느 시장에서나 나를 괴롭히는 의구심이 있는데, 수산시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시장의 종사자는 전문가인가? 어제도 요리책을 번역하다가 그런 구절에 좌절했다. ‘생선장수를 잘 알아두면 요리에 필요한 재료 등에 대한 조언을 받을 수 있으며…’ 과연 한국에 그런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생선 구입처가 있나? 물론 생선장수를 잘 알게 된다면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런 책들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하는 종류는 아닐 것이다.
수족관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물고기보다 바깥에서 바라보고 우리가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끔 길을 가다가 수족관에서 죽은 물고기가 뒤집힌 상태로 있으면 그만큼의 비극도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고요.
선어 유통에 대한 요령이 없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걸 잘하면 활어회보다 더 안전하게, 질 좋고 신선한 선어를 회로 먹을 수 있는데요.
서점에서 어떤 조리과학 번역책을 봤는데, 잡자마자 바로 죽여서 피를 빼고 얼음 속에 묻어서 보관해야 부패를 막을 수 있다고 적혀 있더군요. 게다가 이론적으로 영하 20도 이하에 둬야 기생충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고요. (생선회는 기생충 위험이 크죠) 결국은 생선 가공, 유통만 잘해도 선어도 안전하다는거죠.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활어회 먹는게 맛도 그렇고, 과연 믿고 안전한게 먹을 수 있는건지 의문입니다. 심지어 수족관 보면 뒤집힌 채로 거의 죽기 직전인 생선들도 일부 보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나라의 선어들도 저렇게 잘 유통되는지도 회의적이고요. 설령 그렇게 해도 몇몇 고급 일식집에 한정된 얘기일 가능성이 높고요.
재밌는건 활어회가 메인인 우리나라에서 선어로 유통되는 참치와 연어는 회로 별 탈 없이 잘만 먹죠. 이들은 선어에 대한 불신이 없고요. 결국은 그냥 생각이 없고, 통념이 지배하고, 시스템 미비죠
제목이 대단하네요.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활어와 선어에 대한 선호도는 동등한 것입니다. 선어는 고상하고 활어는 야만적이라는 시각이 왜 생겼는지도 의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논의한다면 화식을 제외한 모든것은 야만적이죠. 문명의 정수인 불의 정화를 받지 않은 음식을 접하겠다니 이런 천한 발상이 어디있나요? 심지어 선사시대에 비해 이가 무뎌진 현대인들이.
횟감으로 쓰이는 닭은 가게 뒷주방에서 그 즉시 목이 뽑혀나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죠.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제대로된 시스템, 혹은 야만적이지 않은 형태로 이루어질거란 생각은 너무 단순한것 아닌가요? 잘 손질된 선어로 유통되기 위해서는 잡자마자 배위에서, 혹은 항구에서 현지 아지매들의 손에 배를 찢기고 목이 따인채 피와 내장이 뜯겨나가야만 합니다. 각 산지에서 그럴 인력이 부족했기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유통이 된다고 보는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네요.
불감이란 측면에선 공감합니다. 그럼 어디까지 공감해야될지가 쟁점일텐데, 좀 잔인하다고는 생각해도 야만이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번역하다 좌절하셨다는 부분. 마트 생선코너에 바지락을 사러 온 새댁에게 오늘은 고등어가 좋다면서 고등어 김치조림 만드는법을 알려주는 상인 정도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건지 아쉽네요
동감입니다
선어나 선호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궁금하시면 제 책 ‘한식의 품격’ 399쪽을 참조하세요.
뒤에 고등어 얘기는
생선장수를 잘 알아두면 요리에 필요한 재료 등에 대한 조언을 받을 수 있으며->물론 생선장수를 잘 알게 된다면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런 책들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하는 종류는 아닐 것이다.
맨 뒤에 다 설명해 두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