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그 요리 (4)- 김애란의 ‘칼자국’과 바지락 칼국수
아주 오랜만에 여유를 잠깐 부렸다. 그래봐야 커피숍에 앉아 소설을 한두 시간 읽었을 뿐이다. 서늘하다 못해 쌀쌀한 공간에 앉아,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이 묘한 대조, 썩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그러려나. 더위를 피하겠다고 기껏 냉방되는 공간에 앉아서는 뜨거운 커피라니. 자연, 물론 좋다. 하지만 그것도 거리를 좀 두었을 때의 이야기다. 모든 관계가 그렇지 않던가. 어쨌든, 아주 오랜만에 잠깐 누리는 여유였다. 그날따라 소설도 좀 묘했다. 아니, 소설 자체는 괜찮았다. 좋았다. 다만 이야기와 그게 불러 일으키는 기억의 관계가 묘했다. 기껏 냉방되는 공간에 앉아 마시는 뜨거운 커피 같았다. 대조가 그랬다는 말이다. 또한 좋았다는 말이다.
기억의 매개체는 칼국수였다. 참으로 낯익은 음식. 김애란의 단편 ‘칼자국’에 등장한다. 2007년 소설집 ‘침이 고인다’의 수록작이다. 어머니는 20여 년간 국수를 팔았다. 가게 이름은 ‘맛나당’, 망한 제과점을 상호에 간판까지 그대로 인수해 썼다. 말하자면 생계형 요식 자영업계에 진출한 것. 콩국 등이 등장하는 가운데, 주 메뉴는 바지락 손칼국수다. 제목이 말해주듯, 사실 ‘칼자국’은 칼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맞겠다. 칼을 쥔 여자, 어머니.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는 칼을 25년 넘게 써 국수를 썬다. ‘오른손이 칼질을 하는 동안 왼손 손가락 두 개는 칼 박자에 맞춰 아장아장 뒷걸음쳤다’는 대목을 읽으며, 나의 칼국수를 떠올렸다. 나에게도 그렇게 면을 써는 손의 기억이 있다. 다만 그 온도는 너무 다르다.
하필 현실과 기억의 온도차도 크니 얄궃다. 후텁지근한 여름날, 차가운 겨울의 기억을 떠올린다. 분명 눈도 내렸다. 당연히 겨울방학이었다. 그렇게 형제는 방학마다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솔직히 즐겁지 않았지만 할머니 음식 먹는 재미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 눈이 와서 그랬던가. 점심 메뉴가 칼국수였다. 할머니의 면 써는 손놀림도 분명히 그러했다. 오른손은 칼질하며 박자를 내고, 왼손은 그에 맞춰 뒷걸음질친다. 그렇다, 당연히 손반죽면이었고 밀대는 홍두깨였다. 오늘날까지 선명히 품고 있는 할머니 손칼국수의 기억이다. 나머지는 희미하다. 국물은 아마도 쇠고기 다시다에게 빚졌을 것이며, 별 건더기가 들어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김치는 계절이 그러니 젓갈 삼삼하게 쓴 늙은호박지였을 것이다. 눈은 정말로 하루 종일 내렸다.
내 칼국수의 기억이 그렇게 따뜻해도 될까. 이제는 잘 모르겠다. 음식 글을 써 번 돈으로 장을 봐다가 내 손으로 삼시세끼 해결하는 삶을 살아보니, 내 칼국수 한 그릇도 ‘칼자국’에 등장하는 맛나당 어머니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랑이 있었건 없었건, 어쨌거나 극단적으로 치우친 노동의 결과물이었다는 말이다. 소설의 나는 그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음식과 함께 칼자국도 삼켰다’고 말한다. 한 세대를 건너 뛰어서 그런 걸까. 나는 그 어떤 칼자국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할머니 부엌의 어두움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궁이 때문에 지면보다 ¼층쯤 아래 자리 잡은데다가 좁고 층고마저 낮았다. 그런 공간을 덩그러니 매달린 알전구 하나가 밝혔다. 그 부엌에서 모든 음식이 태어나, 안방으로 난 쪽문을 넘어 상에 올랐다. 여러모로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다.
소설의 나는 ‘칼국수 만드는 법이 간단하다’고 말한다. 솥에 바지락 포함, 모든 재료를 넣고 끓인 뒤 중간에 면을 넣고 뜸을 들이면 된다는 것. 글쎄, 그래도 맛있겠지만 개선의 여지는 있다. 핵심은 바지락이다. 모든 어패류가 그렇듯 너무 오래 끓이면 질겨진다. 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 일단 입을 열어 정수를 받아내자. 냄비에 물을 자작하게 부어 살짝 찐다. 찜기를 쓰면 국물만 덜어내기 훨씬 편하다. 이 국물을 바탕 삼아 육수를 끓이고, 적절한 시기에 면을 더해 뜸을 들인다. 따로 덜어둔 바지락은 냄비를 불에 내릴때 더해 섞어 주면 뻣뻣하게 과조리 되지 않으면서 온기만 품는다. 조금 번거롭지만 한결 나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