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계륵, 삼계탕
(삼계탕 사진이 없어 흡사한 찜닭 사진으로 대체한다. 물론 글의 내용과는 관련이 전혀 없다)
작년 9월이었다. 제주도 취재길이었는데, 공항에서 렌트카 대리점까지 버스로 이동하면서 문간의 스크린을 넋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호텔이나 음식점의 광고가 연달아 나오는데, 앞다투어 전혀 식욕을 돋우지 않는 가운데 삼계탕의 이미지가 단연 발군이었다. 뚝배기 위로 드러난 다리에서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온 상태. 잘 익었다는 의미지만 완성된 음식으로서는 좀 그로데스크하달까. 물론 닭의 발목에서 종아리 사이에는 살이 거의 없는 부위가 존재하므로 조리 상태에 따라 분리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가끔 정말 지나치다 싶게 살이 이탈된 것들을 본다. 생각나는 비유라고는 전쟁과 관련된 것 밖에 없어서 더 이상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뭐 네가 불만을 안 품는 한식이 있겠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부정할 생각은 없는데, 뒤집어 보면 그만큼 일관적이라는 의미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한마디로 고민이나 디테일의 부족 같은 것 말이다. 삼계탕도 피해갈 수 없다. 심하게 이탈된 다릿살 이야기를 했듯 일단 모양새부터 고민을 안긴다. 이 음식은 과연 아름다운가? 그렇게 믿고 싶은 심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진정 우리는 아름다움에 매료되는가? 삼계탕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물에 창백한 흰색으로 익어 오돌도돌 돌기가 올라온 닭의 표면이 과연 아름다운 걸까?
그래서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혹시 닭이든 뭐든 동물을 통째로 한 마리 그릇에 담아 개인의 몫을 보장한다는 특성을 아름다움이라 승화시켜 믿는 건 아닐까. 물론 조리 및 분배 이후에도 얼마든지 강제적으로 개인의 몫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뚝배기 또는 대접이 오롯이 개인의 영역이니 그 안에 동물을 통째로 한 마리 집어 넣으면 일단 개인의 소유로써 확실하게 구분은 된다. 또한 뱃속에 채우는 재료도 착각에 일조할 수 있다. 내장을 빼낸 공간에 다른 재료도 아닌 쌀을 채운다. 빈속에 주식의 재료를 채워 넣어 ‘한 마리’로서의 완결성을 더더욱 회복시켜 준달까. 그리고 둘은 함께 익어간다. 생명의 상징(계란)을 만드는 뱃속에 또 다른 생명의 상징(벼-쌀)이 채워져 익는다. 어찌 보면 시적이다. 미국의 명절 음식인 칠면조 통구이에도 전통적으로는 빵 등의 재료를 채워 익힌다. 그래서 ‘스터핑(stuffing)’이다.
그런데 이러한 삼계탕의 문법이 정확하게 닭 또는 음식의 최선으로 연결되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일단 한 마리의 형체를 오롯이 지키고 덕분에 각자의 몫을 공평하게 보장해준다는 의미를 뺀다면 통닭이 더 좋은 국물을 내준다고 보기 어렵다. 국물을 내는 재료는 잘아질 수록, 그래서 표면적의 합계가 높아질 수록 짧은 시간에 더 효율적으로 국물을 뽑아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통닭을, 그것도 개별 뚝배기에 한 마리씩 끓인다면 조리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질 수 있다.
사실 삼계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보다 더 크게 회의해오지 않았는데 (사진이 없다는 건 밖에서 돈 주고 사먹을 음식으로 아예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복에 700명분의 삼계탕을 만들다가 조리사 13명이 병원 신세를 졌다는 기사를 읽고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국회의원께서 조리사를 폄하하는 발언을 뱉어 꽤 화가 나 있는 상태였는데, 삼계탕 700인분의 고통이라…
물론 생닭을 한 마리씩 뚝배기에 넣고 처음부터 끓였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경우 뚝배기는 닭이 완전히 잠길 만큼 크지 않으므로 뚜껑을 덮을 수 없으니, 그 상태로는 열손실이 커서 너무 오래 걸린다. 따라서 돈을 받고 파는 전문점에서도 그렇게 할 가능성이 적고, 급식이므로 일정 수준의 대량 조리 후 뚝배기에 옮기는 과정에서 닭의 외관이 좀 상하더라도 불만 또한 적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큰 솥에 몇 마리나 닭을 한꺼번에 넣고 끓였을까? 차가운 물에 통닭을 수십 마리씩 담가 속까지 완전히 익힌 뒤 개별 뚝배기에 나눠 담아 다시 끓여 마무리한다… 닭의 물리적 완결성만 포기했더라면 조리 단위에 상관 없이 시간은 훨씬 단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토막친 닭을 넣고 한꺼번에 끓여도 되고, 조금 더 세심하고 싶다면 토막난 부위 가운데서도 별로 살이 없는 등이나 날개 끝 등을 한 번 끓여 낸 국물에 다리나 가슴 등을 넣고 다시 끓여도 된다. (지금까지 동어 반복) 통으로 끓이는 것보다 수고가 적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런 방법이 적용될 거라 기대하기는 물론 어렵다. 그렇게 끓이면 삼계탕의 완결성이 깨져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700명분 끓이다가 쓰러져야 할 정도로 삼계탕의 완결성은 소중할까?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맛의 측면에서 말이다. 답은 역시 ‘글쎄올시다’다. (여기서부터 동어 반복) 부위마다 근육의 성질이 다른, 즉 익는 정도가 다른 작은 동물을 한꺼번에 끓이니 특정 부위는 더 퍽퍽해진다. 혹시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는 “토종” 닭이라면 기본적으로 질기니 질감이 말도 못하게 훌륭하다. (어차피 맛없는 영계 이야기는 아예 언급도 하지 말자.)
한편 생명의 근원을 낳는 뱃속에 채워지는 또 다른 생명의 근원도 국물에 완전히 잠길 때보다 더 잘 익는다고 보기 어렵다. 참고로 칠면조의 스터핑은 이제 뱃속에 채우지 말고 따로 익히라고 권한다. 칠면조가 익으면서 안전 온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은 육즙이 집중되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에 완전히 담가 오래 익히는 삼계탕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각 쌀알이 개별적으로 잠겨 익을 때보다는 퍽퍽하거나 단단할 수 있다.
한편 토막을 쳤든 통닭을 쓰든, 닭국물은 미완성된 국물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다른 음식의 바탕으로 쓰일 수준의 맛과 깊이인데 그 자체를 먹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과연 최선일까? 끓여도 진한 맛이 우러나오지 않는 영계가 1인당 1마리 보장을 위해 표준처럼 통하는 현실까지 감안하면 삼계탕은 맑은 만큼 탁하고 암울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전복 등을 더하는 게 아니냐고? 과연 맛을 위한 첨가인지, 삼계탕이 굳이 닭 1마리의 온전함을 고집하는 것과 마찬지라고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한 첨가인지 고민 좀 해 볼 일이다.
온도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지겨워서라도 하기 싫다. 그런데 정말 더운 요즘 같은 날에 보신을 위해서 대기 시절이 아예 없는 음식점 앞에서 뙤약볕에 노출된 채 줄서서 기다렸다가 펄펄 끓는 국물을 먹는 게 과연 더위에 맞는 올바른 대처일까. 냉방 잘 되는 프랜차이즈 카페의 아이스 석탄 아메리카노가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지겨우니까 이쯤에서 그만 써야 되겠다. 하여간 삼계탕은 닭 1마리의 완결성을 지키기 위해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미완성 음식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한식의 계륵 같다. 어차피 먹을 것 없는 영계가 표준이 되었으니 이제 닭 그 자체가 계륵으로 전락해버렸다는 대전제부터 슬프지만, 차라리 치킨이 더 나은 (한국식) 닭요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사족: ‘외식의 품격’에서 다른 음식의 바탕으로 쓰인다는 의미에서 ‘닭은 빈 캔바스다’라는 표현을 썼는데(물론 레퍼런스를 거쳐서), ‘맛이 진한 닭도 있으니 틀린 말이다’라는 반론이 돋아났다고 들었다. 물론 그런 닭은 나도 먹어 보았다. 닭의 범주 안에서 맛이 옅고 진한 게 관건이 아니고, 육류의 범주 안에서 놓이는 지점이 관건이다. 참 다들 (헛)수고가 많달까.
기사를 잃고 – 읽고
생명의 근원을 낫는 – 낳는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처럼 맹점을 꼬집는 좋은 내용이었고, 삼계탕을 좀 더 마음 놓고(?) 싫어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아이스 석탄 아메리카노… ㅋㅋㅋㅎㅎㅎ흑흑흑흙 ㅜㅠ
저는…
삼계탕 볼 때마다 박경철 선생 저서 의
치매 시어머니 에피소드가 떠올라 몸서리가 쳐집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 음식입니다.
먹을 때 불편한 건 둘째 치고,
갓난 아이 하나가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여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괴로워요.
꺽어진 괄호를 썼더니 책 제목이 날아갔군요.
‘시골 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습관처럼, 이제는 관습이 되버려서 하나의 당연한 통과의례같이 삼계탕을 소비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 외관이야 당연히 의문을 갖지 않고 식당에서 내오는 대로 먹는거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음양을 구분한답시고 이런저런 한약재 좀 다르게 해서 내오는 곳도 있으니……
보통은 음식을 먹을 때 동의보감에 나오고 몸에 뭐가 좋은지만 알면 당연히 먹어야 하는것으로 여기죠.
의외로 삼계탕의 의미는 삼(蔘)에서 찾는 것이 심플하게 와닿는 듯 싶어요. 닭(鷄)에 의미를 둔다면 언급하신 쓴소리들이 지독히도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공감합니다. 그래서 계삼탕이 아니라 삼계탕이 된 거인지도요…. 음식 형태로 섭취할 수 있는 약(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효능 여부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요.
비주얼에 대한 내용은 새롭고 어느 정도 공감도 됩니다. 한번도 그런식으로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더 깊게 다가오네요. 온전한 한마리를 받는다는 만족감이 낮은 차원으로 여겨져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요. 닭고기와 육류의 비교는 몸보신의 범주에서 삼계탕의 위상으로 치환할 수 있겠습니다. 사족이 조금 구차하단 느낌이 듭니다.
다른 음식의 바탕으로 쓰여야 하는 닭국물만 먹고 살아야하는 블루워커의 입장에서 작성자님의 글은 매번 ‘최선’의 식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제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일으킵니다. 흔해빠진 삼계탕집 일년에 한번 갈 때마다 한국 식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죄책감을 가져야 할 거 같네요. 너무 부띠끄에 치중된 시각입니다. 매번 전통이란 미명하에 상대적으로 ‘최선’이 아닌 조리법을 사용하는것을 경계하고 지적하는 자세는 좋습니다만 저는 거기에 가격대비 성능비라는 현실을 덧붙이고 싶네요. 영계로 끓인 삼계탕보단 노계나 장닭, 능이가 주재료로 사용된 백숙이 훨씬 더 맛있지만 그만큼의 가격이 더해지죠. 어차피 치킨스톡으로나 써야할 재료겠지만요.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였어요. 좋은 시선 잘 읽고 갑니다.
살이 오돌토돌한 닭 한 마리의 비주얼이라.. 하긴, 익숙치 않은 이에게는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음식이네요. 생각해보면 저는 그 끔찍한 이질감을 타국의 통돼지 바베큐에서 느꼈네요. 새끼돼지 로스트? 으.. 말할 것도 없죠. 장식물로는 별 탈 없이 보겠지만 식탁 위에, 제 눈 앞에 차려진다면 글쎄요.. 다소 구토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