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과 재료의 물리적 결합
‘한식의 품격’에서 좀 덜 다룬 음식이 있다. 치킨과 비빔밥이다. 둘 다 적당히 언급했지만 한편 굉장히 지겨운 구석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또한 전자는 ‘외식의 품격’에서도 한 번 다뤘으므로 방법론이나 원리와 상관없이 결과물이 완전히 엉망인 현실이지만 두 눈 질끈 감고 건너 뛰었다. 후자는 젓가락과 더불어 나이 드신 양반이 애지중지하는 이론에 손가락질하기가 다소 내키지 않아 고민하다가 내버려 두었다. 유통기한이 거의 끝난 것 같은데 또 들쑤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 비빔밥과 융합 등등에 대한 이론은 아직도 유통중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비빔밥을 어우러짐(이 융합이니 뭐니 하는 단어들보다 훨씬 더 그 목적에 쓰기에 개념적으로 적확하다고 믿는다)의 상징 음식이라 보지 않는다. 이러한 이론이 아직도 유통되는 건 그만큼 음식에 대한 이해와 상관 없이 현상을 끼워 맞춰 만들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라 본다.
무엇보다 비빔밥은 음식의 핵심 정체성이 물리적인 변화 및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밥도 나물도 기본적으로는 물리적인 변화 위주의 음식이고, 이를 한데 모아 비비는 과정 또한 지극히 물리적이다. 음식과 요리의 가장 본질적인 변화는 화학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재료는 자신의 물성이나 물리 또는 시각적 자취를 포기하는 대가로 맛이나 향을 전체의 경험에 보탠다. 비빔밥에는 이러한 과정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한편 ‘어우러짐’의 수단이라 여기는 비비기조차 재료와 음식의 상태에 진정 어울리는 조치인지 의심스럽다. 쌀을 치대면 치댈 수록 아밀로펙틴 때문에 덩어리지기 마련이고, 이는 기본적으로 쌀의 도정한 알곡을 느슨하게 엮으며 익히는 밥의 최적 상태를 거스른다. 알곡 사이에 적당한 공간이 생기도록 밥을 잘 지어 놓고 도로 망치는 것과 다름 없다는 말이다. 뭉친 밥 사이로 전분 바탕의 고추장 양념장이 끈끈함을 한층 더 강화하고, 나물 등 각종 재료는 만원 지하철의 승객처럼 이리저리 쏠려 다닌다. 과연 비비면 이런 재료의 분배가 한층 더 원활해지는 걸까? 아니라고 본다.
차라리 비빔밥보다 샌프란시스코 쪽에서 나왔다는 수프/스튜 치피노(Chippino)가 훨씬 더 어우러짐을 담아낸 음식 같다. 실제로 어부들이 잡았지만 상품성 떨어지는 재료를 조금씩 모아(chip in) 끓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니 사연도 더 잘 맞아 떨어진다. 게다가 재료가 물에 맛을 제공해 어우러지는 국물 음식이니 한층 더 말이 된다. 한식에서도 진정 어우러짐처럼 긍정적인 개념을 품는 음식을 상징화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흔하디 흔한 국물 음식을 고려해봐야 맞다. 물론, 기본적으로 켜를 발달시키지 않는 조리법 때문에 정확히 어우러졌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생각해보면 의외로 간단한 사안이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음식의 맛은 화학적 변화가 이끈다. 물리적 변화는 원활한 화학적 변화를 위한 준비과정이다. 또한 너무나도 압도적인 시각 위주의 사고도 경계해야 한다. 맛은 본디 추상적인 개념으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경험을 위한 여건을 얼마든지 구축할 수 있다. ‘다양한 재료를 쓰는데 전부 색깔도 다르다-한데 담아 놓으니 보기 좋다-게다가 그걸 비벼서 먹는다’ 같은 논로 비빔밥을 어우러짐의 상징 음식으로 규정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순진할 뿐만 아니라 음식과 맛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의사 결정이다. 여기에 굳이 ‘그래서 비빔밥을 요즘 얼마나 흔하게 먹을 수 있는가?’랄지(심지어 지난 몇 년 동안 먹으면서 찍은 사진이 없다) ‘돌솥의 고온이 굳이 비빔밥에 필요할까?’까지 물어야 할까.
생각해보면 꿈보다 해몽이라고…..지금 한식의 대부분이 온갖 근거없는 문헌을 갖다붙여서 억지로 의미부여를 하고 숭상하는것 같습니다. 음식이 담길 때의 비주얼과 먹는 동안의 비주얼이 전혀 다르다면 그건 성공적인 비주얼이 아니죠.
그저 관습이 굳어지고 나중에 뭔가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싶으니 온갖 이론과 옛문헌을 끌어들여 화장하는 모습은 정말 눈물나게 만드는 한식의 풍경입니다.
돌솥비빔밥은 청각적인 자극을 오래 지속시켜주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바삭한 튀김이나 칩을 한입 깨물었을 때의 쾌감을 타닥거리는 솥에서 느낀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매우 잘아는 프렌치가 돌솥비빔밥을 특히 좋아하는데, 이유인즉 눈으로 보기에 색감이 아름답고, 청각적인 경험이 자극적이기 때문이라더군요. 마지막으로는 잘 섞인 밥알이 바닥에 눌어 바게트의 겉껍질과 같은 미각적 즐거움을 준다고 합니다. 다른 뜨거운 음식은 그닥 즐기지 않는 사람인데도 유독 돌솥비비밥의 돌솥은 “더 뜨겁게” 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을 보면 우리에겐 익숙해서 잊혀진 즐거움이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더 잘 느껴지나 봅니다.
스페인의 파에야 역시 바닥에 눌러 붙은 소르랏이라고 불리는 부분을 가장 맛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쌀 음식이지만 파에야는 소프리토라고 하는 각종 향채들을 오랜시간 약불로 잼처럼 조리해 향의 층들을 쌓습니다.
향이나 풍미의 혼합이나 쌓는과정 없이 단지 물리적으로 조합한 음식에 대한 한계에 관한 이야기에 굳이 이방인 프레임을 가지고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비빔밥을 비비면 국민개밥이 되고 맙니다. 저는 덮밥 카레 비빔밥 절대 비비지 않습니다.
밥과 떡과 죽은 동격이겠네요. 화학적 변화가 새로움을 창조하겠지만 물리적인 혼합이 왜 한단계 낮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우러짐의 상징으로 부적절하다는 건 공감합니다. 궁극적으로 너도나도 빨갱이가 되는 음식이니까요. 비빔밥의 물성이 가장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는것에도 일부 공감합니다만 여기서 더 나가는것은 파인다이닝의 영역 같기도 하구요. 프린터로 출력해내면 완벽한 혼합상태의 비빔밥이 될 순 있겠네요. 돌솥은 누룽지라는 물리/화학적 변화를 동반해줍니다. 먹기 불편하고 왜 거기서 그렇게 만들어야만 하나 싶지만 가난뱅이들이 5천원에 누릴수 있는 공감각적 음식-파인다이닝의 경험-이죠.
Reply 님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