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페미니즘과 남성의 취사 능력
‘페미니즘의 첫걸음은 남성의 취사 능력’이라는 요지의 말을 트위터에서 주워 들었다. 기본적으로는 맞는 말이고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려한다. 남성의 취사능력을 화제 삼을때 숲보다 나무를 보는데 치우칠 가능성이 높다. 단지 밥을 할 줄 알면 되는 것인가. 과연 어떤 밥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간단하게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1. 무엇보다 취사에 얽힌 성편향 고정관념을 타파해야 한다. 취사, 더 크게 보아 가사는 여성의 영역이 아니다. 직업적 조리 세계-레스토랑 주방-의 남성 편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성은 양육(nurturing)을 위한 취사에, 남성은 직업적 취사에 맞는다’라는 주장도 있으나 너무 말이 안되니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걸 차별이라 인식하지 못한다면 젠더 감수성 없는 것이다.
2. 그런 차원에서 취사는 성과 무관한 생존기술의 일부로서 인식해야 한다. 여성이라 할 줄 알고, 시대가 바뀌어서 남성도 익혀야 하는 기술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필요하다. 이는 남성이 취사를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관계에서 시혜적인 태도 취하는 걸 미연에 막기 위한 방편이다. 어설프게 아는 자, 자기가 내키는 영역만 건드리고 공헌했다고 생각하는 자가 가장 나쁘다. 또한 이는 특히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개인이나 가정 차원의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학교 차원의 교육이 필요하다.
2-1. 물론 ‘생존’의 범위는 각자 다르게 규정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단순한 생존을 위한 기술일 수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기술일 수도 있다.
3. 하지만 종종 남성들이 착각하는 경우를 본다. 조리와 요리를 굳이 구분하자면 취사의 cooking이란 조리에 가까워야 하는데 요리여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구애의 방편 같은 것으로 여기는 안타까운 현상인데… 더 이상의 언급은 생략한다.
3-1.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지만 진정 그런 용도로 요리를 써먹고 싶다면 체계적인 학습을 적극 권한다.
3-2. 구애의 방편으로써 요리가 한 단계 더 흑화하면 ‘오빠가 알려줄게’의 맨스플레인 요리가 되는데 더 이상 악한 게 없다.
4. 가장 중요하지만 무경험자가 간과하기 쉬운 사실. 가사 노동의 맥락 또는 범위에서 취사 자체는 큰 어려움이 아니다. 불과 칼을 둘러싼 나머지가 훨씬 크고 어렵고 자질구레하며 힘들다. 앞으로는 장보기, 뒤로는 설거지와 그릇 정리 등이다. 후자는 비교적 순수한 육체 노동의 영역에 속하므로 그래도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전자는 다르다. 단순한 쇼핑의 문제가 아니다. 식재료부터 조미료 등 온갖 사소한 물건의 재고 및 현황 파악은 물론, 메뉴와 실행 계획 등까지 포함한다. 전체를 고려하면 이는 1인 이상의 가정에서 혼자 수행할 수 있는 과업이 아니다.
5. 그래서 바람직한 분업이란 이 전체를 공유할 때에만 가능하다. 워낙 자질구레하거나 임의 또는 무작위적(arbtrary/random)한 요소가 많이 작용해서 칼로 물 베듯 깨끗하게 분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 만약 2인의 관계라면 각자의 전담 영역이 있는 가운데 전체의 60% 쯤을 각각 공유해서 실행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냉장고 상태를 각자의 능력으로 파악한 뒤 전담 영역을 집중적으로 보완하는 방식이다. 한 사람이 채소/고기/과일 등 집 근처 거점에서 구할 수 있는 신선식품을 전담한다면 다른 사람은 쌀/물 등 인터넷 쇼핑 등을 통해 조달 가능한 물품을 전담한다. 쉬운 일이 아니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꼭 저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어떻게든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나름의 분담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결국 한 사람이 짊어지게 되는데 여성이 될 확률이 아주 높으며, 불균형은 반드시 관계에 균열을 야기한다.
정말 동감합니다.
저는 아침은 아내가, 저녁은 제가 하는 것으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서로 겹치는 부분이 적어서 준비나 장보기가 쉽더군요. 일관성있게 메뉴를 짜기도 수월하고요.
좀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려고요. 건너 아는 집 이야기입니다. 연애시절에 아내가 해준 치킨수프에 남편이 그렇게 감동을 하더랍니다. 이걸 직접 만들 수 있는 거였다니 몰랐어! 대단해! 하고요. 알고보니 그 남편은 성장하면서 단 한번도 집에서 요리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고 하네요.
이 아저씨 연배로 역산해보면 그 부모가 아마도 68년 언저리에 결혼하시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당시 여성에게 전가된 가사노동을 아예 거부하자는 주장에 영향을 받으신거라고 하더군요.
어쨌거나 식사는 다 통조림이나 냉동식품으로 해결했다고 합니다. 그랬으니 치킨수프를 사람이 주방에서 손으로 만들어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생소했던 모양이죠. 덕분에 뭘 해줘도 행복하게 먹으니 메뉴 짜는 걱정은 좀 줄었다고는 하는데요.
문제는 주방과 관련된 가사노동 자체를 보거나 해본 적이 없어서 아내분이 옴팡 뒤집어 쓰셨다는 건데요. 시부모나 시누이가 방문이라도 하면, 아무도 그게 일거리라는 걸 인식을 못해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앉아서 받아먹기만 한다 하고요.
덕분에 MIT 출신 엔지니어인 아내분께선 오늘도 혼자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식기세척기를 채우고 계시다는 괴담이었습니다.
이런 남편에게, 가사 분담한답시고 ‘설겆이 해주시고, 설겆이를 하고 나면 칼은 물기를 닦아 말려 꽂아두고, 싱크대 주변 물기를 닦아내고, 행주는 빨아서 걸어놔 주세요. 삶는건 나중에 하죠’ 해봐야 귀에 들어올리도 없고, 일단 이해가 안 가겠다 싶어요.
결국 아내는 하나하나 잔소리하듯 부탁할 수 밖에 없고, 남편은 맥락이 이해가 안 가니 제대로 수행할 수도 없을거고요.
하루에 한 끼라도 전 과정을 경험해보고, 가능하면 전담해봐야 분담도 가능하고 관계도 건강하지 않을까, 마 그렇게 생각합니다.
4번 온몸으로 공감합니다. 회사에서 점심 먹고나면 바로 저녁 뭐 먹을지 고민 시작입니다. 냉장고에 뭐가 남았는지, 어제는 뭘 먹었고 내일 약속의 메뉴는 뭔지, 머리에 떠오른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사려면 어디어디에 들러야 하는지 등등등ㅠ
관련 주제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논리적인 글 같습니다. 담담한 문체는 보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