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비야 게레로-아슬아슬한 솔직함
맛없는 음식에 대해서만 줄창 이야기해서 너무 괴로운가? 당연한 말이지만 나도 그렇다. 블로그에 글을 한 편 쓰면 하루 이틀은 잠을 잘 수가 없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기억의 되새김질이다. 끔찍한 음식의 기억을 다시 새기고 나면 잠이 올리가 없다.
그럴때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면 중화가 되는가?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좋은 음식의 긍정적인 울림보다 나쁜 음식의 부정적인 울림이 더 크다. 말하자면 좋은 게 좋은 정도보다 나쁜 게 나쁜 정도가 더 강하다는 말이다. 또한 확률과 빈도도 사람을 힘들게 만든다. 2:8의 비율이 깨지지 않는다. 나쁜 음식을 여덟 번 먹어야 좋은 음식 두 번 정도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니 사람이 행복해질 수가 없다.
각설하고, 맛있게 먹은 음식 이야기를 해보자. 삼성중앙역 사거리의 비야 게레로에서는 카르니타 타코를 먹을 수 있다. 나도 늘 그러려니 여기고 먹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카르니타(carnitas, “작은 고기”)는 중부 미초아칸(Michoacán) 주에서 기원된 조리법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직화에 어울리지 않는 부위-주로 돼지-를 오래 조리거나 삶아 부드럽게 분해해 타코의 중심으로 삼는다. 매개체는 돼지 기름, 즉 라드다.
초리조는 퀘사디아로 선택하고 고기, 껍데기, 오소리 감투(위), 껍질 타코를 각각 하나씩 먹었다. 적당히 잘 분해된 부속의 질감 위로 돼지스러움이 퍼져, 아슬아슬한 솔직함이 인상적이었다. 순대집 같은 데서 먹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질펀하고 강한 돼지 부속의 맛을 가급적 그대로 전달하려는 측면에서 솔직한데, 그 와중에서 한단계 더 ‘임팩트’를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닌가 싶어 아슬아슬하다.
일단 솔직함부터. 한식은 육류 냄새의 긍정적인 측면마저 ‘잡내’로 몰아붙인다. 그래서 냄새의 박멸을 조리 목표로 삼는다. 웬만한 순대집 등에서 돼지 부속을 먹으면, 눈으로 볼때보다 맛의 차이가 너무 적다고 느낀다. 특유의 냄새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분해는 완전히 되지 않아, 오소리 감투 같은 부위는 때로 고무를 씹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조리한 부위를 강한 새우젓이나 쌈장 등에 푹 찍어 먹으면 결국 부위의 특성 등은 완전히 배제된다.
비야 게레로에서 먹은 부속은 좀 달랐다. 분명 냄새가 다소 강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떨어지는 신선도나 불완전한 조리 때문은 아니다. 반투명해질 정도로 부들부들하게 삶아, 입 안에서 꼭 필요한 저작 강도 및 행위만을 요구하는 껍질 등의 조리 상태는 훌륭하다. 다만 그에 비해 조리 방식, 특히 간이나 마무리하는 재료의 영향이 미미해 아슬아슬하다. 무엇보다, 이 정도의 냄새와 조리 상태를 가진 주재료-돼지와 부속-이라면 일단 재료 자체의 간이 좀 더 강해야 한다. 재료를 익히는 매개체의 간이 약하며, 또한 마지막에 토르티아에 담아 낼 때 수분 관리에도 좀 더 세심하게 신경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재료를 익힌 ‘국물’이 타코 전체 경험에 긍정적인 영향을 못 미친다. 살사나 다른 부재료의 맛을 흐리는 것은 물론 밀가루 토르티아가 찢어질 수도 있다. 입에 넣기 전에 매개체(vehicle)가 훼손되면 만두나 타코 같은 음식의 정체성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아슬아슬했다.
한편 맛과 질감 양쪽 측면에서 부재료가 잡아줄 수 있는 균형 및 증폭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음식점보다 재료에 대한 믿음이 없다. 고수는 물론이거니와 양파의 향이나 맛도 약하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다. 만드는 이가 현지에서 배워온 대로 양을 맞춘다면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재료에서 소금간이 살짝 부족하다고 느꼈다면, 부재료에서는 산이 좀 더 힘을 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레몬즙 몇 방울로는 좀 약하고, 더 강한 와인 식초 등을 쓴 피클 같은 부재료가 신맛과 아삭함을 동시에 줄 수 있지 않을까. 가장 균형이 맞았던 음식이 치즈 섞인 초리조 퀘사디아였는데, 시사하는 바가 있다.
어쨌든, 좋다. 당장의 조리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맛의 바탕이 되는 사고를 중요하게 본다. 늘 말하지만 사람이 만드는 음식이니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다. 그건 언제나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만 맛내기의 논리 또는 사고는 못 고친다. 특히 몸담았던 문화권의 맛을 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도 전에, 그렇게 못하는 부분을 원래 알고 있던(즉 “한국적”인) 맛과 해당 논리로 치환 또는 정당화한다면 미래가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 한국식 맛내기의 논리가 과학 및 이성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검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비야 게레로에서 그런 맛은 느낄 수 없어 좋았다.
사족
- 부속이 그렇게 무미무취의 고무를 지향하는 한편, 사람이 만드는 순대의 경우 거의 100%의 확률로 달지도 짜지고 않은, 들척지근한 좌표에 이르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과 역시 들척지근한 소스의 국산 타코 브랜드의 맛과 상관 관계는?
- 만두피도 있고 구절편 같은 음식도 분명 존재하는데, 우리가 아는 밀전병과 우리가 모른다고 믿는 토르티아 사이의 심리 및 실제 거리의 차이는 대체 얼마나 큰 걸까? 독자적인 라면 식문화가 튼튼한 나라에서 ‘라멘’에 쓸 수 있는 생면의 수준은? 이 모두의 거리는 과연 의도적인 것일까?
음 기초적인 질문입니다. 부들부들한 질감, 특유의 풍미와 균형을 위해 짠맛이 좀더 필요하다고 이야기가 되는것인지요? 맛의 조각을 연결지어 생각하기가 쉽진않습니다만 여쭤봅니다. 신맛은 특유의 느낌이, 아삭함과 연계되기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이해했구요. 선생님 글을 보면서 습관과 다른 차원으로 음식을 느끼는 방법을 점점 조율해보게 됩니다. 이해는 쉽지않지만요. 제부족으로.
매장에 정통 마쭈아칸 스타일인가.. 마초아칸 스타일인가.. 라고 써놔서 대체 그게 뭘까 고민하다가 멕시코의 지역 이름인 걸 알아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비슷한 조합으로 타코 세개를 맛있게 먹었고 오후 내내 더부룩한 위를 붙잡고 있었던 생각도 다시 났습니다.
비야 게레로는 본질에 충실한 본토 음식의 재현을 잘해내려고 노력하는 집인 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멕시코 못가본 사람이지만..) 말씀하신 것 처럼 또띠야를 흥건히 적시는 국물은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는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데 이게 라드에 은근히 절여낸 고기와 더불어 소화를 방해하는 요소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기름이 많은 음식은 대개 소화에 안좋더라구요.
맥주와 같이 먹으면 몰라도.. 탄산음료로는 그 더부룩함을 쉽게 씻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그냥 비야게레로 나오니 반가워서..몇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