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니예와 ‘웰메이드’ 음식, 아뮤즈 부시의 확장과 주방의 노동력
스와니예 이야기를 해보자. 역시 들었다. 그럴싸한 명칭을 붙여 놓았지만 궁극적으로 아뮤즈 부시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진의 요리는 크림 치즈를 곁들인 구운 파다. 육개장 등을 통해 워낙 그렇게 먹어 버릇해서 대부분 무감각하겠지만, 통째로 익힌 파의 질감은 미끈덩거리고 유쾌하지 않다. 파란 윗동과 하얀 아랫동이 조금 다른 뉘앙스로 미끈덩거린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서양 대파(leek)는 조금 다르다. 익혀도 질감이 훨씬 덜 불쾌하다. 백화점 식품매장 등에서 팔지만 흔치 않고 훨씬 비싸다. 그래서 후자를 전자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아닌가 이해했지만, 어쨌거나 특유의 질감 때문에 성공적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런 평가를 셰프가 의식했노라고 들었다.
세부사항도 언급하고 싶지만 짐작하건대 사적인 대화의 맥락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아 말겠다. 다만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총체적으로 스와니예의 식사는 비교적 훌륭한 수준이었다. 매니저가 문자를 구구절절이 보내는 건 확실히 과잉이었지만 서비스가 전반적으로 아주 훌륭했다. 심지어 조금 덜 친절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주로 통하는, 굴종-그래서 당연히 부정-적인 서비스와는 달랐다. 나름의 요령과 격이 존재했다. 아무래도 열린 주방과 바의 공간이 혼자 먹기엔 좀 편하므로 취재는 줄곧 혼자 했고, 심지어 남자 지배인-정말 훌륭한 서비스업 종사자라고 생각하는-은 굳이 문 밖까지 배웅해주며 ‘매너가 너무 좋으신 손님’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이런 나라는 인간이 심지어 비판이 섞인 리뷰를 쓰면 졸지에 악한으로 인식이 바뀌는 것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니면 누군지도 모르는 1인객이 알고 보니 어떤 방식으로든 영업에 100의 1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특정인물인데 “관리”를 못한 아쉬움이라도 남는 건가? 다시 한 번, 모두가 학교 졸업하고 경험 쌓았다는 서양의 그렇고 그런 나라에서 리뷰어가 대놓고 존재를 미리 밝히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리뷰어의 익명성에 대해 온갖 매체에 이야기가 소개된 바 있지만 어차피 안 읽을테니 소개는 하지 않겠다. 아니, 그리고 어차피 내가 무슨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더더욱 않은 마당에 왜 의식을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또한 난 대체 평가라는 걸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 자체가 궁금하다. 출범 당시 편집진의 의견을 반영해 뺐지만 리뷰에 별점을 주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했었다. 그럼 스와니예는 별 네 개, 80점 이상은 될 것이다. 뭔지도 모를 리스트에서 1, 2위를 다투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재방문을 적극 고려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누군가 특별한 경우를 위한 파인 다이닝을 선택한다면 권해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랬다. 스와니예는 그런 레스토랑이었다.
80점으로 도저히 만족할 수 없다고? 그럼 좀 더 잘하면 된다. 고민 끝에 아름답고 심지어 우아하다고까지 생각한 서비스가 덮었지만, 연말 만석인 상황에서 실시간 조리가 필요한 음식의 완성도는 중간중간 꽤 낮았다. 주방이 열려 있으면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몇몇 요리는 주방으로 돌려 보내고 싶었다(물론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 다시 한 번, 지난 리뷰 꺼내서 다시 칼질하려는 의도는 아니니 이쯤에서 멈추자. 아까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다고 했다. 그 두 번째가 소위 ‘웰메이드 음식’의 방법론으로 만연하는 아뮤즈 부시의 확장이다.
‘웰메이드’란 대체 어떤 상태인가. 제대로 설명하려면 글을 따로 써야 되겠지만, 일단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 한 상 차림 한식으로 보자면 반찬을 잔뜩 냈지만 실제로 먹잘 것이 별로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상 위에 접시가 가득 차 있으므로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좋고 맛있으리라 반응하지만 들여다 보면 깎은 당근이나 오이 같은 종류로 대다수를 채워 놓은 상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반응을 의도하고 계획 또는 본능적으로 조성 및 구축한 상태가 바로 웰메이드다. 핵심을 외면하고 변죽만 울리는 상황이다. 콘셉트가 이끌어 가는 직선이 아니고, 덕지덕지 곁가지 잔뜩 붙은 곡선이다.
많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이러한 웰메이드의 방법론으로 아뮤즈 부시의 확장을 활용한다. 몇몇 레스토랑의 리뷰에서 이를 언급하려다가, 거듭된 방문 속에서 전반적인 패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아예 언급을 피했다. 테이스팅 코스 초반에 한 입 거리 음식이 연이어 등장한다. 그 자체로 코스 속의 코스라고 규정해도 무방할 경지다. 작고 때로 예쁘거나 아기자기하니(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쉽게 감탄할 수 있다. 게다가 메뉴에도 개별적으로 설명해 놓지 않는다. 원래 아뮤즈 부시는 메뉴에는 없는, ‘셰프가 주는 (깜짝) 선물’의 개념이다. 못 했건 안 했건, 기대하지 않은 음식이 나오는 사실만으로 경험으로서 파인 다이닝에 즐거움을 더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존재하는가. 거듭되는 아뮤즈 부시의 홍수 속에서 나는 분명한 패턴을 읽는다. 맛은 차치하고서라도, 음식의 완성도가 분명하게 갈린다. 아뮤즈 부시는 멀쩡하고 깔끔하지만 뒤로 갈 수록 헐렁해진다. 헐렁해지는 방식 또한 레스토랑에 상관 없이 일관적이다. 단백질+소스+가니시의 구성이라면 단백질 자체의 조리는 비교적 멀쩡하다. 수비드 중심의 앞서가는 조리의 영향이라 본다. 하지만 ‘비교적’이다. 이마저도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보다 전체 조화의 부재가 확연하다. 단백질을 중심으로 나머지 요소를 아울러 내는 상태가 엉성해진다는 말이다. 단순한 담음새일 수도 있고, 각 요소의 온도나 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식사의 즐거움은 뒤로 가면서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렇게 ‘코스 안의 코스’로 확장된 아뮤즈 부시 자체가 문제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도무지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00%라고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확장이 쉽게 취할 수 있는 ‘웰메이드’의 방법론으로 활용 더 나아가 악용되는 한편, 그 과정에서 공정하지 못한 노동력이 투입될 가능성을 경계한다. 레스토랑 음식 전체를 보아 상대적으로 단순한 편에 속해, 아뮤즈 부시는 레스토랑 노동력 위계질서의 아랫쪽 계층이 주로 맡는다. 또한 코스 안의 코스 격으로 여러 가지를 내더라도, 본격적인 코스의 요리의 축소판과는 다르다. 실시간 조리-와 높은 숙련도-가 필요한 단백질을 빼고도 구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줄지어 등장시켜 인식에 벽을 친다. 마치 내가 좋은 음식을 먹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맛보기 코스를 내는 곳이라면 피해가기가 어렵다. 지난 달에 리뷰한 권숙수 같은 레스토랑에서도 ‘주안상’이라는 개념으로 아뮤즈 부시의 무리를 한 상에 담아 낸다. 어느 레스토랑이든, 때로 복잡해 보이지만 그 복잡함을 일궈낸 손이 정확하게 코스 뒷부분을 개선할 수 있을 만큼의 숙련도를 지닌 것 같지는 않아 보일 때가 있다.
달리 말해, ‘이 아뮤즈 부시의 행렬을 줄이고 그 노동력을 그대로 재배치해서 후반부에 등장하는 본격적인 요리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쓸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레스토랑이 실행 가능할까? 아울러 그렇게 아뮤즈 부시를 맡는 노동력은 과연 주방의 위계질서 사다리를 밟아 올라갈 수는 있는 것일까? 나는 레스토랑 주방의 사정을 대부분 모르고, 그쪽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나의 일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음식에 너무나도 투명하게 반영되는 경우를 본다. 오직 손만 쓰는 손이 만들었음을 감추지 못하는 음식 말이다.
ㅡㅡ자기는까도되고까이는것은 싫다는 투정으로밖에 읽히지않는 일기네요
제 생각엔 배려에 배려를 더해 꾸역꾸역 좋게 말씀하신 것 같은데, 어떻게 이 글이 투정으로 읽히는 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