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P, Zaha Hadid
끝도 없는 불면으로 소파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부고를 트위터로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 시간으로만 만우절이었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부고는 좋은 거짓말 거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건강에 대한 뉴스를 들은 기억이 없어서 그 또한 충격이 컸다.
요즘 훌륭한 이들의 부고를 많이 들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을 떠났다. 데이비드 보위, 글렌 프라이도 떠났다. 각각의 죽음은 독립적인 무게로 다가오지만, 자하 하디드의 소식은 특히 크나큰 충격이다. 비단 내가 건축 전공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 2003년 여름, 그녀의 비트라 소방서를 처음 경험했을 때다.
대학원의 여름 학기 수업이었던 유럽 건축 답사는, 사진으로만 보던 건축물을 실제로 접하는 경험을 일깨워 준 소중한 기회였다. 르 코르뷔지에를 비롯 온갖 거장의 수많은 건물 가운데 그녀의 건물이 가장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모더니즘 이후의 건물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기간 비엔나에서 열린 그녀의 전시 또한 이해를 도왔다. 좁게는 건축, 넓게는 여행과 경험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던 여름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자하 하디드가 있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 크다.
흔히 건축을 남자의 직업이라고 말한다. 한술 더 떠 마초의 직업이고, 미국에서 일할 때에는 백인의 필터마저 한 켜 더 붙었다. 백인 마초를 위한 직업이라는 말이다. 실제로도 국제적 차원에서 활동하는 여성 건축가가 아주 드문 현실을 감안할 때, 그 맨 앞자리를 지켜온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은 아쉽고도 아쉬운 일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작년 여름 한국 타이어 사보 ‘뮤(Miu)’에 실었던 그녀의 프로파일을 덧붙인다.
* * * * *
‘페이퍼 아키텍트(Paper Architect)’라는 표현이 있다. 문자 그대로 ‘종이 건축가’라는 뜻이다. 건축가에게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다. 문자 그대로 종이에 그릴 뿐 실제 건물의 완성은 못 본다는 비하가 스며 있다. 물론 건축가의 스케치는 그 자체로서 작품 대접을 받는다. 미국의 전문지 ‘아키텍처럴 레코드’에서는 냅킨 스케치 공모전도 매년 연다. 하지만 그것도 실제로 완공을 본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가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지만, 디자인을 맡은 자하 하디드도 종이 건축가의 세월을 오래 감내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라크에서 나고 자라 영국에서 건축에 입문했다. 베이루트의 아메리칸 유니버시티에서 수학을 공부한 뒤, 실험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유명한 AA 스쿨(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에서 입학한 것. 졸업 후에는 AA 스쿨에서 가르치는 한편 동문인 렘 쿨하스의 OMA에 합류하는데, 이 시기는 오늘날 그녀의 위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모두 실무 건축가로서 그녀의 출발이 순탄치 않았던 탓이다. 꾸준히 아이디어를 냈지만 그녀에게는 현실화하기 어려운 건축가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심지어 건축 외적인 불운도 겪었다. 최초의 국제 설계 경기 당선작인 빅토리아 피크 재개발 디자인은 홍콩의 중국 반환 과정에서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취소된 것이었다. 1994년 스위스 바젤의 비트라 소방서가 드디어 완공되었지만, 렘 쿨하스로부터 독립한지 15년 뒤의 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자하 하디드를 도와준 존재가 바로 렘 쿨하스다. 그는 실현가능성을 놓고 고민하던 그녀를 독려하는 한편, 구조 엔지니어 피터 라이스를 소개시켜준다. 그는 항공 공학을 전공하고 구조 컨설팅 회사인 오브 아럽에 몸 담은 전문가로서 자하 하디드를 지원한다. 그렇다면 왜 그녀의 건축은 현실화가 어려웠을까. 피터 라이스는 7년이나 프로젝트의 발을 묵었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구조 해결책을 내놓은 장본인이다. 바로 개성적인 지붕 모양 때문이었는데, 자하 하디드의 건축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그녀 또한 건축의 통상적인 기하학을 거부하는, 폭발적인 형태와 공간을 자신의 언어로 삼기 때문이다. ‘360도의 가능성이 있는데 왜 하나(직각)에만 집착하는가?(There are 360 Degrees, So Why stick to one?)’라는 한 마디가 요약해주는 건축 세계다.
그래서 첫 현실화는 1994년이었지만, 그녀만의 역동적인 공간 언어는 결국 2000년대로 넘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베르기셀 스키 점프대(2002년)는 꼭대기의 전망대가 그대로 곡선을 그려 내려가면서 스키 점프를 위한 슬로프가 되는 디자인으로 주목을 끌었으며, 이듬해에는 오하이오 주 콜럼부스의 로젠탈 현대 미술관으로 미국에 진출한다. 뉴욕 타임즈의 건축 평론가 고 허버트 머스챔프는 각각 다른 깊이를 지닌 채 중첩된 덩어리의 이 미술관을 “냉전 이후 미국에 자리 잡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물”이라고 호평했다. 이러한 활동의 힘을 입어 하디드는 2004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 상을 받는다. 여성은 물론 아랍계로서 최초였다. 또한 로마의 맥시(MAXXI, 21세기 미술관)으로 2010년, 영국 왕실 건축상인 스털링상도 수상한다.
이후 그녀의 행보는 한때 ‘도저히 지을 수 없는 디자인’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건축가로서는 너무나도 활발하다. 8년의 기획 공사기간을 거쳐 동대문에 자리 잡은 디자인 플라자는 그녀의 단일 프로젝트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환유의 풍경’이라는 콘셉트가 다소 난해하게 들릴 수 있지만, 결국 굽이치면서도 매끈하게 흘러 하나인 형태며 공간이라 보면 된다. 한편 이라크 중앙은행을 통해 고국 이라크에도 진출했으며, 첫 완공작인 소방서의 터전이었던 비트라 공장(그녀 외에도 안도 다다오 등 세계적인 건축가가 각자의 디자인으로 전체에 공헌했다)에 이어, 같은 바젤 소재 제약회사 노바티스 본부에도 프랭크 게리 등 다른 건축가와 ‘올스타 컴플렉스’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또한 뮤 2014년 봄호에도 소개한 바 있는 불꽃 타워의 도시 바쿠(아제르바이젠)에도 형태와 구조, 기능과 음향 설비가 동시에 조화를 이루는 헤이다르 알리예브 문화 센터가 현실화되었다. 요즘은 특히 대규모 체육시설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2020년 일본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 디자인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