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 양육권 분쟁과 순대, “서민”음식의 팔자
2016년 2월, 삼성가의 이혼 소식이 매체에 오르내렸다. 별 관심 없다. 그럴 필요 없는 사생활의 영역이다. 재벌가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없다. 세상에 매끄러운 이혼이 존재할까. 남이 호기심을 이유로 고개-서양식 표현이라면 코-를 들이밀 이유가 없다. 그것은 저열함의 표출이다. 다만 아이 아빠의 항소 이유서가 관심을 끌었다. 글의 초입에서 이미 인용했다. ‘면접교섭을 하고서야 (아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라면을 먹어보고 일반인들이 얼마나 라면을 좋아하는지 알았고, 떡볶이, 오뎅, 순대가 누구나 먹는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출처)는 발언 말이다. 일종의 대외적 평판 싸움(publicity battle)을 위한 전략으로 이해했다. 변호사를 포함한 보좌진이 낸 아이디어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왜 굳이 서민 카드일까? 어쨌든 삼성가와 혼사를 맺은 이다. 더 이상 서민일 수 없다. 거기까지도 좋다. 하지만 왜 하필 저런 음식을 걸고 넘어지는 걸까? 다른 음식도 그렇지만, 특히 순대의 위상이 가장 크게 마음에 걸렸다.
물론 순대의 세계는 단순해지고 다양성도 없어졌다. 이제 당면 순대가 주류로 통한다. 영역을 넓히며 인식의 블랙홀로 변모했다. 다른 순대의 존재를 빨아들여 왔다. 이제 ‘순대=당면 순대’로 통한다. 물론 당면만 동원되는 것은 아니다. 찹쌀이나 양배추 같은 재료도 엄연히 존재는 한다. 하지만 쓰임새가 같다면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맛이 아닌 부피 확보를 위한 재료라는 말이다. 다르지만 같은 재료고, 모두 순대라는 음식을 납작하게 만든다. 겉을 이루는 재료도 다양하지 않다. 한때 소나 개의 창자 및 고기를 써 만들었다지만 이제 문서로만 남았다(전자는 규합총서, 후자는 음식디미방). 오징어나 명태의 속을 채운 순대는 실물로 존재하지만 간신히 명맥을 잇는 수준이다. 재료의 섬세함과 채우기의 어려움, 둘이 맞물려 터지기 쉬운 양식의 특성 탓에 순대를 포함해 소시지 계통의 음식은 집에서 만들기가 어렵다. 천상 전문가의 솜씨로 만든 걸 사먹어야 하는데 그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 1일 생활권이라지만, 서울에선 이런 음식이 아주 드물게 존재한다.
그래서 다양한 순대를 먹지 못한다. 그게 뭐 대수라는 건가? 아닐 수도 있다. 순대 하나 다양하지 않다고 해서 삶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순대 하나만 놓고 보면 분명 그렇다. 하지만 순대는 예외가 아니다. 만두나 김밥 같은 음식도 같은 팔자를 겪는다. 그렇게 작다면 작고 또 대수롭다면 대수로울 일상 음식의 기초가 하나씩 빠진다. 그 결과인 다양성의 부재는 생각보다 꽤 넓고 복잡한 차원으로 영향을 미친다. 음식의 가격대가 올라갈 때 일상 음식에서 출발해 개념적 이해를 바탕으로 재해석 및 발전을 통해 승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항상 백지에서 시작하거나, 연결 고리가 듬성듬성한 음식을 만난다. 비싼 음식과 싼 음식이 전혀 다른 양식과 문법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
서민 음식의 고급화가 불가능할까? 만두와 순대 같은 음식은 언제나 한두 가지의 납작한 존재로 서민음식의 울타리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햄버거 같은 음식이 반례로서 존재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기원은 패스트푸드다. 각 요소를 전담해 반복 조리한 뒤 한데 조립하는 형식이 효율적인 대량생산을 촉진했다. 그 결과 햄버거는 ‘패스트=정크 푸드’로 통한다. 하지만 맥도날드나 롯데리아 같은 프랜차이즈 외에도 다양한 가격대와 그에 맞는 햄버거가 존재한다. 이제 ‘수제 버거’라는 명칭만으로 아우르기에도 덩치가 커져 버렸다.
물론 내실도 있다.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는 셰프나 사업가가 햄버거 가게를 낸다. 숙성은 기본이고, 서로 다른 부위를 섞어(blending) 특유의 맛을 낸다. 아예 소를 통째로 들여다 직접 부위별로 바르고 갈아 패티를 빚는다. 조리의 과학적 원리를 탐구하는 부류도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낸다. 갈아낸 고기의 결을 흐트리지 않고 가지런하게 담아 가벼움을 극대화한다. 저온조리로 익힌 뒤 액화질소로 튀겨 낸다.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상 음식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다양성을 좇는다는 사실이, 현상이 중요한 것이다. 가격이 주로 나누는 영역대에 맞는 해법이 존재한다. 패스트푸드로서 햄버거도, $30짜리 고급 외식 수단으로서 햄버거도 공존한다. 물론 그 둘 사이의 영역도 다채롭게 나뉘어 있다.
심지어 이러한 현상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더 놀랍다. 한국에서도 햄버거는 이제 꽤 다채로운 결을 갖추기 시작했다. 동경이든 소위 ‘덕심’이든, 가격과 일치하는 고급 햄버거가 부쩍 늘었다는 말이다. 6,000원과 12,000원짜리 햄버거가 꽤 그럴싸하게 공존한다. 곧 사이의 결도 좀 더 다채로와질 것이다. 조짐도 보인다. 하루 세 끼의 지평이 이렇게 바뀌어 가는 가운데, 순대 같은 음식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햄버거의 예를 들었지만, 문법화된 어떤 음식이라도 적용할 수 있는 원리다. 한식에서도 전무하지는 않다. 불고기나 갈비, 된장찌개 같은 음식은 대표 음식으로서 일정 수준 문법화 및 다양화 되었다. 게장 같은 음식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빈약하다. 순대처럼 크래프트맨십이 필요한, 아는 손의 가치가 적극 개입할 수 있는 음식이 서민의 굴레를 벗고 다양성을 갖춰야 한다.
햄버거는 그나마 주로 즐기는 젊은 층들이 더 고급 햄버거에 대한 필요를 느껴서 시장이 생겼지만, 순대는 과연 얼마나 수요가 있을까요…어르신들 보면 아직도 아메리카노를 몇천원 씩이나 주고 먹는다고 젊은 사람들을 사치와 허영™의 대명사로 보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정작 그분들이 생활에 있어 절박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 말이죠)
저는 이게 어느 정도 닭과 달걀의 문제라고 봅니다. 없어서 못 먹고 모르니까 가능성을 따져볼 수 없고요.
집에 소세지 백과사전이 있는데요,
한국 소세지는 순대 하나 겨우 들어가 체면(?)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설명이 웃픕니다.
“당면을 채워 만든다.”와 “떡볶이 먹을 때 같이들 곁들여서 먹더라.” ㅎㅎ
순대는 이제 대외적으로도 당면 순대로 이미지가 고착화한 듯합니다.
‘서민 드립’ 하니 생각 났는데,
소유진씨가 백종원씨하고 결혼하기 전에 방송에 나와
자기 남편 될 사람이 부자임에도 얼마나 소탈한지를 강조하고 싶은 마음에
“이 사람이 서민음식도 잘 먹고요..”
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지요.
그쵸, 뭐든 섬세하게 결을 나누어 즐겨야 살 만한 세상이 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는 김치도 어째 점점 획일화해가는 것 같아요.
한국도 지금쯤 되면 서양인들 고장별 치즈나 와인처럼 김치가 척척척 나와줘야 하는데
제가 모르고 있는 걸까요? 뭐든 전국통일인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옷도 뭐 하나가 유행하면 짧은 순간에 전국에 광풍이 일다 지나가고.
산이 많으니 사람 사는 공간이 너무 작아서 그런가.
콜라비 김치 같은 것도 나오는 걸 보면 뭔가 시도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만 이유가 중요하겠죠. 하여간 다양성은 갈수록 떨어져 갑니다.
부자가 가난한 삶을 모른다고 비난 받은건 아니다. 단지 그들이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서민 생활을 들먹이는것 자체의 어리석은 발상이 그마저의 애정까지 자르고만 것. 순대나 김치의 세계화에 실패한건 자기것을 소중히 하지않는 고질병같은 국민성 때문이다. 우리 청년들이 전쟁중 격은 억울함이나 독도의 영토 싸움이 미국때문에 위태로워진것과 전통 음식은 대기만 지켜야한다는 지랄같은 편법이 이제 전통도 없는 미아국을 만들것이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만 순대나 김치의 세계화가 우리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결과라고는 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