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 메르씨엘-애호박, (화이트) 와인, 파인애플, 공간

매월 레스토랑 리뷰가 실리면 후일담 형식으로 지면에 못 담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번번이 시기를 놓친다. 지난달의 파씨오네도 그렇게 놓쳤다. 다음달 리뷰 마감을 끝냈으니 사실 11월의 메르씨엘도 시기를 놓쳤다고 봐야 한다.

1. 애호박

그래도 글을 남겨야 되겠다고 생각한 건, 이 애호박 때문이다. 먹었다고, 또는 글을 썼다고 음식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 오랫동안 생각, 아니 복기한다. 몇 년 동안 그러는 경우도 있다. 사진의 애호박도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 좀 더 완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리뷰에서도 밝혔던 관건은 질감. 애호박은 조리하기 어려운 채소다. 덜 조리하면 설컹거리고, 너무 익히면 완전히 물러 버린다. 처음 부산에 들렀을때 이 호박을 먹고 분명히 어느 지점을 향하고 싶었으나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찾았을때는 전체의 조리 저하에 맞춰 완전히 물러있었다. 전자는 덜 익었으되 흥미로울 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훌륭한 관자와 어떤 식으로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질감이었다면 요리가 한층 더 훌륭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좀 더 두툼하게 잘라서 은근히 삶거나(poach) 저온조리를 한다면 어땠을까. 그 과정에서 새로운 맛이나 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른 건 바질이었다. 애호박과 바질의 향은 죽이 잘 맞는다. Poach의 과정에서 향을 불어넣을 수 있다. 한편 이는 요리 다른 요소의 역학관계(dynamics)를 총체적으로 다른 지점에 올려 놓을 수 있는 기회도 불러올 수 있다. 그냥 생으로 올린 엔다이브에 시트러스 비니그렛을 입힌다면 엔다이브-시트러스-바질-애호박의 연쇄 반응 및 조금씩 다른 질감이 요리를 훨씬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 보았다. 이대로도 실행이 100%일때는 훌륭한 요리였지만, 언제나 더 좋아질 수 있는 기회는 있다는 말이다.

2. 화이트 와인

세 가지. 첫째, 많은 사람들이 즐겨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선택할 수 있는 와인 짝짓기 프로그램을 두는 것은 좋으나, 가격 등을 통해 접근성을 향상시키려하다 보니 품질이 타협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마디로 음식과 별도로 리스트를 통해 주문할 수 있는 와인에 비해 질이 썩 좋지 않다는 말. 나도 이미 한번씩은 마셔본 것들이라 더더욱 익숙한데, 둘을 짝지으면 음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 레스토랑에서 제안 가능한 와인 짝짓기가 이 수준에서 멈춘다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도 아쉽다. 훌륭한 와인 리스트에 비해 다양하게 맛을 볼 기회를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어차피 계절별로 바꾸는 코스 메뉴를 운영한다면 한 단계 더 높은 와인 짝짓기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는 없는지 궁금하다. 이를테면 코스 가격의 75~100% 수준으로 그에 딱 어울리는 종류를 음식 별로 조금씩만 내는 것이다. ‘소믈리에 추천 페어링’ 같은 딱지를 붙인다. 물론, 토요일 저녁 단 1회전 하는 가운데서도 레드 하우스 와인 두 잔 시킨 테이블이 와인 최대 소비객이라면 어떤 시도도 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셋째, 어울림. 셰프와 소믈리에가 알사스나 론 등, 한국에서 (이유를 모르지만) 가장 많이 마시는 샤르도네를 벗어나 두툼하면서도 드라이한 화이트를 좋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심지어 염가로 내는 짝짓기에서도 한국에서 인기 있다고 하면 거짓말일 리즐링이나 토론테스를 쓴다. 이게 나의 취향과도 맞아서 즐거웠는데, 정작 음식과 아주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공통적으로 와인이 가지고 있는 신맛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시트러스 껍질 뉘앙스의 씁쓸함이 좀 많이 올라온다. 심지어 나는 그걸 꽤 즐기는 편인데도 이 짝짓기의 전반적인 논리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3. 디저트-파인애플

미국에서는 재능 있는 파티셰들이 레스토랑의 울타리 안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등 일련의 이유를 들어 ‘디저트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현실이다. 뒤집어 말하면 재능 있는 인력이 한국의 현실에서 레스토랑에 머무르기란 정말 어렵다. 일반 음식(savory food)에 비해 완성도 높은 디저트를 만나기가 어려운데, 당연한 말이지만 전문 인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때 심화된다. 단적으로 접근 방식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그렇다. 몇 가지 먹어본 바, 클래식이라 빼도박도 못하는(그럴 필요도 없는) 크림 브륄레를 빼놓은 나머지는 요소를 좀 덜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티라미수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언급한 바 있고, 파인애플 카르파치오는 계절을 무시한다면 맛의 조합은 좋았으나 진공 압축 등을 통해 날것의 질감을 덜어내면 좋겠다고 보았다. 물론 ‘카르파치오’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파인애플 특유의 섬유질은 확실히 레스토랑의 마지막 디저트에서 그대로 쓸만한 것은 아니다.

4. 공간

바다가 보이는 입지는 안타깝게도 밤에 매력을 완전히 잃는다. 밖은 어둡고 내부는 밝으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이라면 낮에 두세 시간짜리 긴 점심을 먹으면 정말 좋을 것이라 본다. 한편 지면에는 전혀 여유가 없어 언급을 못했는데 접객은 총체적으로 내가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더 좋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음식이 바뀌는 타이밍이나 손님의 도움 요청에 응하는 페이스가 전반적으로 매끄럽지 못했다. 나는 이걸 비효율적인 평면-공간의 문제로 보았다. 긴 사다리꼴 공간이라 입구-주방쪽에서는 공간이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설사 보았다고 해도 오는데 시간이 좀 걸리며 보폭이 본의 아니게 넓어진다. 중간지점에 전담 대기 인력이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보는데, 구성상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넓은데 식탁은 드문드문 놓을 수 밖에 없는 평면이라 여러모로 손해를 본다는 느낌.

여러모로 서울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레스토랑이다. 굳이 언급해야 한다면 해산물의 수급을 빼놓고는 훨씬 나은 여건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부분의 서울 소재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게 의문을 품어야만 할 때나 유용할 것이다. 맛도 그렇지만 태도나 시각의 레퍼런스로 의미 있는 존재다.

 

6 Responses

  1. ? says:

    “여러모로 서울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레스토랑이다. 굳이 언급해야 한다면 해산물의 수급을 빼놓고는 훨씬 나은 여건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부분의 서울 소재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게 의문을 품어야만 할 때나 유용할 것이다. 맛도 그렇지만 태도나 시각의 레퍼런스로 의미 있는 존재다.”

    이해가 좀 어려운 문장이네요.

    • 남자라면FR says:

      여러가지 의미에서 굳이 서울의 레스토랑과 비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의미 있는 존재다.

      굳이 서울과 비교급으로 언급된다면, “해산물의 수급을 빼놓고는 훨씬 나은 여건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럼에도 맛이나 태도, 시각에서 부족한 것이 많은 서울 소재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게 의문을 품어야 할 때나 불러야 할 이름이다.

      라고 이해했습니다.

      즉, (해산물 수급을 제외한) 서울의 여러 좋은 조건(경제적 집약으로 파인 다이닝을 운영하고 소비할 계층-지역이 존재)에도 불구하고 아쉬울 때에, 여기를 봐라~ 라고 할 지언정

      굳이 여기를 평가하는데 서울과 비교해 낫느냐 못하냐를 따질 필요 없이, 상대평가 아닌 절대평가로써 충분한 의미를 갖는 존재

      라고 이해했습니다.

  2. 태건도 says:

    실망했읍니다.
    이번리뷰.
    매우.매우
    좀 틀리신 분이라 생각 했었거든요…

    하튼 메르씨엘.
    로비력은 어느곳과도 비교안되는 것 인정합니다.

    블루마스마저 접수라.
    한국은 상품보다는 로비가 실력인듯….

    담에 랜덤으로 한번 더 방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