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5의 끝

2015-10-23 07.47.07

아침 일곱 시 반에 일어나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 집 근처 대리, 아니 직영점으로 향했다. 전화기를 바꾸러 가는 길, 발걸음도… 썩 가볍지는 않았다. 이게 뭔가. 귀찮았다. 예약을 하는데는 단 3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 문자를 한 통 쏘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니, 그게 사실은 시작이었다. 택배 수령을 선택하려니 애로가 많았다. 일단 쓰던 요금제를 선택할 수 없었고, 더 알아보니 기변포인트도 쓸 수 없었다. 전자만 안되는 거라면 월초에 다시 바꾸는 조건으로 택배 수령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3만원 포인트도 써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결국 집 근처 직영점을 택했다. 어제, 각기 다른 직원이 한 번씩 전화를 걸었다.

들어갔더니 되려 나보고 어떤 기계를 예약했느냐고 묻는다. 헐. 아무 거나 말하면 줄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실버를 택했다가 ‘남자의 색깔’이라 인터넷에 소문이 쫙 퍼진 로즈 골드 생각이 나서 어제 좀 망설였던 터였다. 어쨌거나, 허술하지 않은가. 목록을 확인하지 않고 되려 나에게 물어보다니. 직원 말로는 새벽에 점장이 일산의 물류 센터에 가서 물건을 받아 왔다고 한다. 심지어 어젯밤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하여간 그는 나에게 영업을 시도했다. 필름과 케이스를 사은품으로 주니까 대신 월말까지만 뫄뫄 요금제를 써 달라는 것. 잠깐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니 1주일 동안 차액이 크지는 않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영업을 하려 드는가. 필름과 케이스라는 것도 합쳐 몇 천원 안 될 물건이다. 원래 요금제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니다. 그럼 가볍게 물리치면 그만이다. 그도 더 이상 붙들고 늘어지지 않는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녹음할 준비까지 다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더 귀찮을 일은 없었다. 보니 옆자리 직원은 20대 여성에게 뭔가 알 수 없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같은 걸 영업하고 있었다.

이후의 과정엔 별 게 없었다. 미리 따져본 시나리오를 직원이 잘 따라가는지만 확인했다. 순간, 지난 2년 10개월 남짓 써온 아이폰 5는 영혼을 빼앗긴 육신 형국으로, 전원은 들어오되 기능을 멈추었다. 디지털에는 의미라는 것이 없는가. 그럴리가 없다. 얼마 전에도 독일에서 몇 십년을 계셨다는 철학자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스마트폰, 셀피 등등을 비판했다. 늘 그런 태도가 웃기다고 생각하는 건 두 가지 이유다. 첫째, 비판이 일단 아주 쉽고 잘 먹힌다. 발전하는 건 일단 비판하면 아주 편하다. 추종자도 많이 생긴다. 발전의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어차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둘째, 그런 의미에서 사실 이 양태에 중간지점이란 없다. 스마트폰을 비판하면 기타 문명의 이기는 대체 어떤 생각으로 쓰는가. 스마트폰은 외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촘촘하게 얽힌 그물망의 현재 시점일 뿐이다. 외계 문명이 지구인을 말살시키려 의도적으로 떨군 음모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됐고, 스마트폰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철학을 끌어들이는 이는 혹시 반대로 긍정하는데도 똑같이 할 수 있는지 고려해보았을까 궁금하다. 이런 거다. 나는 어젯밤, 마지막으로 클라우드에 이전 전화기의 데이터를 백업했다. 언제나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새 전화기를 받아서는 그 자료를 그대로 다운 받아 복구했다. 예전의 정신이 새 육체를 가진 것. 이건 Reincarnation이 아닌가? 여기에 과연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

그렇게 정신을 이식했지만 어쨌든 옛 전화기의 육체는 이제 쓸모 없어졌다. 워낙 전화를 걸고 받을 일이 없어 데이터 위주 요금제를 쓰지만, 이 전화기의 생명을 접수하며 받지 말아야 할 전화, 안 받은 전화, 온갖 거절의 통화와 문자의 기억이 떠올랐다. 드문드문 일어나지만 그만큼 기분은 더러워지는 그 모든 것들을 위해 지난 2년 10개월 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