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예능: 블랙홀?
내가 미국을 뜰 무렵인 2009년 초, 푸드 네트워크는 새로운 쇼를 출범했다. 제목은 ‘찹드(Chopped)’, 요리사 네 명이 등장, 바구니에 담긴 비밀 재료를 가지고 30분 안에 요리를 만든다. 말하자면 이미 인기를 얻은 ‘아이언 셰프 아메리카’의 세컨드 브랜드 격. 전채-주요리-디저트의 세 라운드를 거치며 한 명씩 떨구는 방식인데, 조화롭지 않은 재료를 던진다는 게 핵심이다. 위키피디아에 착실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간 쇠고기, 카넬리니 콩, 타히니 (참깨 페이스트), 포도 젤리(!)와 같은 조합이다. 디저트라면 밀가루 토르티야, 프로세코, 캐너디안 베이컨, 군밤과 같은 조합이다. 한마디로 요리사를 병신-막말로-으로 만들겠다는 전제. 따라서 제한 시간 내에 요리를 아예 못 만들거나 완성하되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조합을 내는 재미로 보지만(완성된 음식도 개밥 같은 ‘비주얼’을 자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걸 넘어서 말이 되는 음식을 만들어 내면 그 재미는 몇 배가 된다. 그래서 쇼는 큰 인기를 끌었다. 애초에 아이언 셰프 등에 나올만한 실력은 아닌 이들이 출연했으니, 적당한 어설픔 사이에서 음식 같은 음식을 보는 쾌감이 상당했다.
‘아이언 셰프 아메리카’의 출범 당시에도 내부 갈등이 있던 푸드 네트워크는, ‘찹드’의 성공에 고무되어 요리 대결-서바이벌-예능쪽으로 더 과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2011년에는 같은 콘셉트로 디저트를 만드는 ‘Sweet Genius’라는 쇼를 출범시켰고, 슈퍼마켓에서 제한 시간 내에 재료를 집어다가 요리하는 ‘Guy’s Grocery Games’, 나눠주는 돈으로 경매를 통해 조리도구-촛불?-등을 사서 경쟁자의 요리 여건을 악화시키는 ‘Cutthroat Kitchen’ 같은 쇼도 만들었다. 한편 이전 세대의 시연 및 요리 강습형 쇼는 별도의 브랜드 Cooking Channel를 출범시켜 옮겼다. 이렇게 과격한 방향 전환이 안기는 쾌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출연자의 수준이 차츰 낮아졌고, 그에 맞춰 음식의 수준도 낮아졌다. 적당한 광대짓 사이에서 음식이 나와야 보는 재미가 있는데, 일정 수준 이상을 갖춘 출연자를 소진하고 나니 이제 광대짓을 할 사람들 밖에 남지 않은 것. 2013년 경에는 어느 시간에도 광대짓 밖에 볼 수 없었다. 자칭 요리사들이 출연해 요리를 하다가 손을 베고, 초등학생이 발로 만든 요리를 내고, 남들보다 재료를 먼저 차지하겠다고 뛰어다니다가 자빠지고, 경쟁자에게 촛불로 요리를 하라고 던져주고는 낄낄대고 웃었다. 음식 쇼를 표방했지만 이미 음식이라고 할만한 것이 단 1로 남지 않은 상황. 그렇게 방향 전환을 이끌었던 요리 서바이벌은 블랙홀이 되어 채널의 정체성과 의미를 빨아들였다.
어차피 케이블을 달아놓지 않은지라 자주 볼 일은 없지만, 어쩌다 눈에 들어오는 한국 음식 예능의 수준은 참혹하다. 스테이크에 맛 차이가 날리 없는 녹차 소금, 파래 소금 같은 걸 내놓는 셰프가 심사위원인 판국에 뭘 기대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식 예능 자체가 쓸데없으니 싹 없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이 필요 없는 즐거움도 때로 필요하고, 음식 예능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음식의 차원에서 최소한의 개연성은 지녔을때 가능하다. 셰프의 개연성, 요리사의 개연성까지는 가지 않아도 된다. 최소한의 지능을 가진 인간으로서 먹고 사는 문제에 접근하는데 필요한 개연성이다. 어제 오늘 인터넷에서 화제였던 ‘맹모닝’은 그러한 개연성이 전혀 없었다. 생선통조림은 특유의 비린내를 분명 가지고 있지만, 얼마든지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있는 재료다. 이미 완전히 익었으므로 조리가 많이 필요 없으니, 으깨어 형식의 전환을 꾀할 수 있다. 멘보샤처럼 빵 사이에 넣고 튀긴다거나, 크로켓을 만들 수도 있다. 요는, 이름 뒤에 ‘셰프’라는 직함을 붙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웃기기 위해 만드는 쇼라고 해도 꽁치 먹고 토한 걸 빵에 발라 놓은 음식 같은 걸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단지 재료와 재료를 합쳐 익히는 게 요리가 아니니, 그걸 이해하고 최소한의 개연성조차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면 음식이 아니므로 예능에 대한 기대가 아무리 낮다고 해도 ‘음식’ 관련 쇼로서 즐거움은 주지 못한다. 그것이 음식이든 자동차 정비든 패션 디자인이든, 최소한의 성공조차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로 웃기는 출연자는 결국 쇼의 의미를 깎아 먹고 만다. 그리고 거기까지 수준이 내려갔을때, 우리나라의 음식 예능도 블랙홀이 될 것이다.
따져보면 이미 그럴 자질도 충분히 갖추었다. 애초에 서바이벌 아닌 요리쇼도 푸드 네트워크가 맨정신일 때처럼 요리 자체를 가르쳐주겠다는 콘셉트가 아니었으며(‘요리하는 나’보다 ‘요리하는 남을 보는 나’), 출연자의 ‘풀’도 훨씬 적다. 거기에 TV에 출연하는게 커리어의 중심인 셰프와,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는 게 중심인 셰프의 집단이 갈리는 상황도 아니다. 요리사가 쇼에 출연하는 상황이 아니라, 쇼에 출연하기 위해 요리의 기믹을 입는 것 같은 상황이다. 다시 한 번, 녹차 소금, 파래 소금을 내는 셰프가 출연자도 아니고 심사위원인 현실이다. 계산이 어렵나? 차라리 기한을 정해놓고, 블랙홀의 파국을 맞는 상황을 일종의 메타-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왠지 그럼 즐겁게 볼 수 있을지도.
소금 말씀하시니까 디자이너들이 1픽셀 따지는게 생각나는군요 ㅎㅎ..
영화 ‘픽셀’도 곧 개봉한다던데요.
‘냉장고를 부탁해’의 최현석 셰프는 심사위원이 아니라 출연자예요.
심사위원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은 ‘한식대첩’이구요… ㅎㅎ
그리고 한식대첩은… 흠… 그 프로엔 누가 나와도 출연자보다 경력이 높긴 힘들것 같아서요~~
네, 저도 한식대첩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음식 예능 전체에 대해 말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일한 시간으로 환산하는 경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경력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더욱 큰 걱정(?)은 그런 마인드가 어느새 저에게도 슬금슬금 침범했다는겁니다. 친절히도 그 셰프분이 네가지 컨셉의 소금에 대해 설명하자, 무지한 저는 그 맛을 느껴보려고 무진 애를 썼거든요. 옷을 벗기고 몸을 봐야하는 상황인데 옷 재질에 집착하게 되는 불쌍한 나.. 여튼 잘 읽고 갑니다-
그보다는 좋은 옷을 만들어야 할 디자이너가 작은 장신구나 단추를 놓고 모든 콘셉트를 설명하려 드는 것 같달까요…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