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이해(22)-음식과 말: 한식 표준 번역안
NOTE: 이 글로 약 2년에 걸쳐 <미식의 이해>의 연재를 마쳤다. 아마도 당분간은 가장 즐겁고 의미있는 매체 기고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시간이 좀 지나기는 했지만, 다른 매체에서 기억하고 있다가 창간에 맞춰 불러주신 편집장님이나 연재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부담 안 주신 담당 에디터-디렉터 님에게 감사한다. 이 콘텐츠는 아마도 내년 이후에 완전히 새로 써서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될 것이다.
음식 관련 책을 꾸준히 번역한다. 올해 안으로 두 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요리책부터 철학자의 수필집까지 다양한 책이 거쳐 가는 가운데, 가장 큰 어려움은 용어 번역이다. 작가의 개성이 달린 문장도 중요하지만, 낯선 요리 용어를 잘못 옮기면 독자가 책 내용 자체를 이해 못할 수 있다. 일관성이라는 대원칙이 있지만 엄수는 어렵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는 말처럼 일괄적인 적용이 불가능하다. 예외를 최소화하는 한편, 그 예외에도 개별 또는 공통적인 논리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지난 5월 국립국어원이 확정했다는 <주요 한식 200가지의 3개 국어 표준 번역안>을 들여다보자. 외국인 대상이라면 한식 파인 다이닝 및 그를 통한 세계화의 기반으로 매우 중요하다. 내게 익숙한 한국어-영어의 관계만 따져보겠는데, 맥락부터 살펴보자. 이 표준 번역안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2013년 10월 9일, 즉 한글날을 맞이해 이미 발표한 시안을 다듬어 이번에 확정 발표한 것이다. 큰 그림을 보자면 한식재단(농림수산식품부 산하)과 한국관광공사(문화체육관광부 산하)가 각각 가진 안을 조율 및 통일하는 작업이다. 로마자 표기를 통일해 혼선을 없애고 표준 번역안을 통해 외국인의 이해를 돕자는 취지다.
한식재단에서 배포한 표준안을 들여다보자. 먼저 불고기나 비빔밥처럼 이미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다고 여겼다는 음식은 번역안 또한 고유명사화 시킨다. 표준 로마자 표기와 번역안 모두 ‘bulgogi’와 ‘bibimbap’이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번역안마저 ‘불고기’와 ‘비빔밥’으로 정한다면 음식의 맛과 형식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이 가능한 걸까? 표준안을 확정하는 취지는 한식이 낯선 외국인에게 이해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자는 것일 텐데, 과연 그 목적의식에 충실한 결과인 걸까? 게다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음식에 적용하는 규칙 자체가 이미 예외다. 불고기와 비빔밥을 비롯해 김치와 김밥(!)까지, 표준안의 대상인 200가지 음식 가운데 단 네 가지에만 해당된다. 반론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김밥에 예외를 적용한다면 한때 세계화의 대상으로 집중 홍보했던 떡볶이의 번역안은 왜 로마자 표기 그대로 ‘Tteok-bokki’가 아니고 ‘Stir-fried Rice Cake’인가? 게다가 ‘stir fry’는 중국식으로 웍에서 짧게 후루룩 볶는 조리법을 영어 표현으로 옮긴 것으로 ‘소테(sauté)’와 같다. 국물이 자작해질 때까지 보글보글 끓여 스튜에 가까운 떡볶이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는다. ‘볶음’이라는 조리법을 문자 그대로 옮기는데 집착한 결과로 보인다.
나머지 196점을 들여다보자. 육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연합뉴스를 필두로 한 매체 보도에서 주연급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리라. 심지어 한때 트위터에서 열심히 돌던 ‘육회=식스 타임즈’의 짤방 이야기마저 소개했다. 시답잖은 농담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느낌이랄까. 하여간 육회의 사정은 이렇다. 관광공사에서 2012년 발행한 한국 메뉴 가이드 앱에는 ‘Yukhwe’라 표기하던 것을 ‘Yukhoe’로 통일했으며 번역안은 ‘Beef Tartare’로 확정했다. 빠른 이해를 돕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스테이크 타르타르를 빌어 육회를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 어차피 ‘(스테이크) 타르타르’라는 형식 자체가 주로 다진 날 것의 단백질에 소스를 곁들인 요리의 통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첫 번째는 맛의 설명이다. 한식은 재료+양념(소스)의 조합이고 후자가 맛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재료와 조리 형식만 제공하면 스스로 맛을 알리는 기회를 버리는 셈이다. 프랑스 요리의 경우도 20세기 초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가 집대성한 베샤멜, 에스파뇰, 벨루테, 홀랜데이즈, 토마트의 다섯 가지 엄마 소스(mother sauce)와 그 무수한 변형이 음식 맛에 영향을 미치는 기본 요소 및 지표로 쓰인다. 예를 들어 ‘베르네이즈 소스를 곁들인 스테이크(Steak with Sauce Béarnaise)’라는 표기를 통해 조리 방법과 소스를 통한 맛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한식에서 양념의 비중을 감안할 때, 우리도 이러한 논리를 적극 검토해봐야 한다. 한식재단의 담당자는 ‘표기의 간소화가 목표였다’라고 배경을 설명했지만 맛을 설명 못할 정도의 단순화는 의미가 없다.
두 번째는 논리의 활용을 통한 일관성의 지향이다. 번역의 대원칙이 일관성이라 언급했다. 날 단백질을 다진 요리 형식이 타르타르라면, 우리의 회처럼 저민 형식은 ‘카르파치오(Carpaccio)’나 ‘크루도(Crudo)’로 통한다. 이왕 타르타르를 빌어 육회를 설명할 것이라면 회는 ‘Sliced Raw Flatfish’가 아닌 ‘생선 이름+카르파치오/크루도’가 적합하고 또 자연스럽다.
최소한 로마자 표기만이라도 통일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여전히 아쉬운 표준안이다. 일일이 지적하기에 지면이 모자라지만 용어의 선택에서도 일관성의 소금 한 큰 술이 부족하다. 양념돼지갈비는 ‘Grilled Pork Rib’이지만 돼지갈비구이는 ‘Grilled Spareribs’으로 옮겼는데, ‘Pork Rib’은 각각 다른 부위인 Sparerib과 Baby Back Rib의 통칭이니 구분 없이 써도 무방하다. 한편 송이 버섯은 ‘pine mushroom’이라고 쓸 수도 있지만 실제로 서양에서는 일본 식문화의 영향을 받아 ‘Matsutake Mushroom’으로 통한다. 쉬운 이해를 위해 한식 설명에 일본식 영어 표기를 써야만 하는 걸까? 실무자들이 고민해야 할 과제다. 우리는 과연 우리 음식의 맛을 스스로 그렇다고 믿는 만큼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 지점에서 다시 고민해볼 것을 제안한다.
-월간 ‘젠틀맨’ 2014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