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이해(19)-한식 파인 다이닝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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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반복.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의도적인 재활용도 싫지만 멀건 국물이 나올 때까지 같은 소재를 우려 먹는 건 더 끔찍하다. 하지만 이달에는 부득이 동어반복이 필요하다. 물론 변명의 여지는 있다. 썼으되 공개는 못한 말의 반복인데다, 큰 그림을 보면 사실 주제가 동어반복이다. 즉, 이번 달의 칼럼은 동어반복에 대한 동어반복이다.

시계를 3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꼭 3년 전의 4월이다. 2월호의 ‘물약병’을 낸 신라호텔에서 ‘한복 소동’이 터졌다. 소동이야 그렇고, 진짜 문제는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는 점이다. 그 호텔을 비롯해 다른 특급 호텔의 한식당 부재를 걸고 넘어졌다. 심한 논리적 비약이었다. 설사 한복을 홀대했더라도 한식당의 부재는 별개의 문제며, 사업체인 호텔이 굳이 이득 안 나는 사업을 할 이유는 없다. 미식 문화에 이바지하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적자를 끌어안고 간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안 한다고 욕하는 건 옳지 않다.

돌아가는 상황에서 힌트를 얻어, 기고하던 매체에 기획안을 냈다. ‘특급 호텔 한식당의 현주소,’ 소동 이전 들른 호텔 한식당이 문제의식을 안겨줬다. 형편없는 음식이 소동 이후 단지 한식당이라는 이유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것. 문제의 뿌리가 깊다고 보아 그 김에 다른 곳-그래 봐야 전부 네 군데-도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O’보다 ‘X’가 많은 목록, 글로 녹여 제출했더니 금방 연락이 왔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냐’는 요지. 언제나 먹은 대로 쓰는지라 ‘아니다’고 답했더니 ‘칭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고료라도 받으려면 기사가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거부했고 기사는 실리지 않았으며, 우연인지 이후 다시 요청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3년, 싣지 못한 기사가 담은 비판은 오늘도 거의 고스란히 유효하다. 그래서 ‘동어반복에 대한 동어반복’이다. 거기에 한복 소동의 호텔마저 개보수를 하면서 한식당을 추가했다. ‘목표가 미슐랭 별 도전’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으니, 이를 지난 몇 달 동안 주제의 큰 줄기로 삼았다. ‘정말 별이 고프다면 한식’이라는 결론도 내렸다. 본질적으로 승산이 높지만, 현재형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근거는 무엇일까.

일단 큰 그림, 즉 형식부터 보자. 호텔 소재를 비롯해 고급 한식당은 코스로 음식을 낸다. 양식의 형식을 빌었다. 자칭 코스예찬론자지만 한식에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도 자체만으로 문제 삼을 이유는 전혀 없다. 음미를 위해서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단, 본질을 살리는 적용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한식의 본질? 밥과 반찬이다. 이어령은 한식 밥상의 축소판인 비빔밥을 ‘디지로그’ 개념의 예로도 삼았다. 자율적인 ‘믹스 앤 매치’를 통한 맛의 선택을 미덕으로 본 것이다. 문화는 동등하므로 우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반찬 문화가 한식의 개성이자 핵심인 것만은 사실이다. 따라서 코스를 만들기 위해 밥상을 해체하면 개성도 같이 해체된다. 반찬을 단독으로 올려서? 그보다는 탄수화물의 부재가 더 문제다. 아무래도 음식 맛이 허전해진다. 여기에서 밥이 딜레마를 안긴다. 빵처럼 뜯어 먹을 수 없으니 상에 코스 내내 두기 모양새가 안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방법이 없을까? 젊은 셰프는 ‘한식 비스트로’에서 떡갈비에 쌈밥 두 덩이를 곁들여 냈다.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한다. 우리는 20년 만에 열 가지에 이르는 전자기기를 한 대의 전화기에 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음은 맛이다. 의식적인 가벼움의 추구가 두드러진다. 가벼운 식사는 가정의 몫이기도 하거니와, 간장, 된장, 고추장이 자리를 드러나게 잃는다. 이는 반찬의 사정과 마찬가지다. 우열과 시비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 문화의 일부다. 레시피대로 쓰면 먹을 수 없을 만큼 과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정반대로 아예 들어내다시피 하는 것도 극단적이다. 왜 수많은 가운데 영역의 가능성을 저버리는가. 서양인의 입맛에 안 맞을 까봐? 카날루냐 레스토랑 엘 세예르 드 캉 로카의 셰프 후앙 로카는 일전의 인터뷰에서, 된장과 치즈를 함께 내는 전채를 구상했노라고 밝혔다. 단백질을 발효시켰으니 맛과 향에 당연히 통하는 구석이 있다. 본질을 이해해야 새로운 것이 나오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콘셉트의 부재도 따져보자., 고급 한식당은 반찬 대신 코스를 ‘믹스 앤 매치’로 구성한다. 편한 요소를 전후 맥락 따지지 않고 식탁으로 불러들인다. 신선로의 뒤를 아이스크림이 잇는 식이다. 일관성이 딸린다. 잊혀가는 음식을 올렸다면 디저트도 그런 걸 시도할 수는 없을까? 이를테면 다식은 한식 코스의 푸티 푸르로 훌륭한 가능성을 지닌다. 이런 걸 이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아니면 어디에서 먹겠는가. ‘한식 코스라면 전통 재현으로 가자’는 게 아니라, 스스로 좇는 가치에 맞는 고민의 흔적을 맛보고 싶다는 의미다.

‘와우 요소(wow factor)’의 부재는 파인 다이닝 전반의 문제다.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이를 한식에 불어넣기란 사실 더 어렵다. 떡갈비에 쌈밥을 곁들여내던 셰프는 ‘백 명이면 백 명의 한식 기준이 다르고 그걸 기대한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의 레스토랑은 이제 과거지사다. 한식당의 수익 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나는 40석 규모의 새 한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었다. 어려울 수록 본질적인 것을 돌아봐야 한다. 그래야 동어반복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월간 ‘젠틀맨’ 2014년 4월호

6 Responses

  1. 잉여킹 says:

    고급 한식당의 목표는 사실 미식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소위 ‘국뽕’ 이라고 하는 세계시장에 한국 깃발 꽂기가 주 목적이라 저런 형태가 된 듯 하네요.

  2. 이재칠 says:

    새로운 형식, 즉 낯설어지게 하는데 고민의 흔적도 없이 한정식을 해체해서(…) 내놓으니 꼭 여러명이 단품식사를 하는데 음식이 따로 나오는 느낌을 받는게 아닌가싶어요.

    • bluexmas says:

      네 맞습니다. 저도 딱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금 더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3. NOW says:

    밥과 반찬이라는 것이 ‘본질’일수도 있겠지만 한식의 발전가능성을 묶는 족쇄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일본도 막상 가정식은 밥과 반찬이지만 세계적으로 성공한 메뉴는 거의다 단품위주인것처럼요.. ‘음식 맛의 허전함’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쌀밥이 아니더라도 코스에 국수나 냉면같은 면(혹은 떡?)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탄수화물의 부재 문제도 어느정도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 bluexmas says:

      제 주장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코스가 불가능하고 나쁘다는 이야기보다, 코스화를 하려면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탄수화물을 단품 요리에 곁들일 수 있는 방법은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