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돋는 북유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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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요즘은 북유럽에서 자아 찾는 것이 대세인가. 그 얘기를 들으니 언젠가 잡지에 실었던 글 생각이 났다. 원래 이런 건 써서도 실어서도 안되는 건데 그때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행동에 옮겼는지 잘 모르겠다. 어차피 매체에 실었던 건데 블로그에 올리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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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어 잘 못해서.”

그가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영어는 딱히 신통치 않다. 그러나 내 코, 아니 영어가 석자라고. 어 나는, 그러니까 미국에서 왔는데 원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나의 손을 덥석 잡아끈다. “안에 가보자.” 그의 손은 따뜻하다. 일을 해서 달궈진 손이다. 장례식장인 예배당 앞에는 조문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오늘 저들이 보내는 사람의 무덤이, 그의 손을 거쳤으리라.

스톡홀름에는 무엇이든 다 있다. ‘올타임 미녀 리스트’를 10초에 한 번씩 갱신해야 할 정도로 예쁜, 백발에 가까운 금발의 처자들이 레깅스에 자전거를 몰고 휙휙 지나치고, 미슐랭 별을 뽐내는 레스토랑이나 화려한 클럽도 있다. 서울이라면 오래 전에 화석이 된 레코드가게는 또 어떻고? 진짜 ‘피카(fika)’를 위한, 소박한 케이크와 쓴 커피를 파는 빵집이며, 바이킹의 호방함을 고칼로리로 승화시킨 청어 튀김을 으깬 감자와 내놓는 노점도 있다. 금상첨화라고, 그 모든 것들이 반짝이며 굽이치는 물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맥락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나의 스톡홀름은 그러한 중심지에서 벗어난 곳이다. Skogskyrkogården. 뭐라고? 복잡하니 그냥 정식 영어 명칭을 대령한다. ‘우드랜드 공동묘지(Woodland Cemetery)’.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건축가 구나르 아스플룬트가 학교 동창인 시구르트 레베렌츠와 젊은 나이에 따낸 프로젝트다. 너른 초원에 거대한 십자가가 하나 떡하니 박혀있다. 틈만 나면 ‘베토벤은 악성,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건성(건축의 성인)’을 읊던 명예교수의 수업 시간, 그가 직접 찍어왔다는 사진으로 머릿속에 심어 놓은지 꼭 10년 만의 발걸음이다.

“여기로 관이 올라오고.” 그의 말처럼 예배당 한 가운데에 관을 위한 자리가 있다. 처음 죽음의 존재를 인식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원치 않은 대학 동문 야유회인지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크림색 바탕에 빨갛고 파란 줄무늬가 가로로 둘러싸는 시외버스. 반쯤 열린 창틀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바깥 풍경. 버스 여행의 끝은 집, 시간 여행의 끝은? 죽음. 딩동댕. 순간 바깥 풍경이 암전으로 돌아서고, 나는 그 이후 한날한시도 죽음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예배당의 삼면을 둘러싼 벽화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운데 벽화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해의 나라. 배를 탄다.” 수평선 저 멀리, 터질 것 같이 밝은 해가 떠 있다. 그 빛이 물 위에 드리운 길을 타고, 배가 한 척 나아간다. 빛으로 나아간다. 세상을 떠난 이가 타고 있다. 남아 있는 이들이 그의 여정을 바라본다. 이 사람들은 떠나는 곳이 지금의 세상보다 밝은 땅이라고 생각하나보다. 그래서 예배당의 이름 또한 ‘Uppståndelsekapellet’, 부활의 교회다.

부활의 공간을 보여준 그에게 인사를 하고, 눈앞에 보이는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9월 초의 스톡홀름은 이미 10월 중순의 서울 같다. 바람이 꽤 차갑다. 그래서 아직 내 손에 남아 있는 그의 체온이 더 살갑다.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언덕에 오르고자 발걸음을 재촉한다. 꼭대기에는 ‘명상을 위한 작은 숲(Almhöjden)’이 있다. 길게 드리운 느릅나무가 어깨동무하며 벤치를 감싸고 있다. 명상까지는 버거워, 나는 그저 굽어본다. 여름의 활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진녹색의 잔디 사이사이로, 이제는 망각하기에도 유효기간이 지난 이름들이 가지런히 누워있다. 너무나도 많은 죽음 앞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나도 그저, 저 많은 이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두려움의 속껍질도 조금씩 벗겨진다. 삶은 계란의 그것처럼, 섣불리 벗겨내려 문질렀다가 애꿎은 살점마저 때로 뭉텅이로 함께 떼어냈던 껍질이다. 여러 겹의 속껍질을 벗겨낸 끝에,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글쓰기의 욕망과 마주한다. 죽음처럼, 너무나도 그 존재가 뚜렷하기에 오랫동안 부정하고 또 외면해왔던 욕망이다. 내가 먼저 팔을 벌린다. 그도 조심스레 나를 따른다. 그리고 엉거주춤, 그와 나는 재회의 포옹을 나눈다. 미안, 그동안 외면해서. 앞으로 쭉, 함께하자. 그리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덕을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