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에 대한 잡담

어제 점심께 집을 나설때는 분명 해가 쨍쨍하고 적당히 포근했다. 그래서 옷을 얇게 입고 나갔다가 추워진 날씨에 낭패를 보았다. 하루가 절반이나 꺾인 시점에서 집을 나섰지만 그 절반의 하루를 꼬박 거의 다 쓰고 집에 들어왔다. 그렇게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대략 책 한 권 분량의 말을 하고 돌아왔는데, 집에 와서 복기해보니 ‘치욕’이 가장 많이 생각났다. 그렇다, 이 현실에서 미칠듯이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말을 위한 말, 글을 위한 글을 만들어 내야 할때 가장 심하게 느낀다. 나는 설명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설명을 해야 하는가. 설명을 위한 설명이 나를 힘들게 한다.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

그나마, 정말 그나마 집을 나서기 직전 인세가 입금되었다는 문자가 하루 종일 완전히 바닥까지 치지 않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돈도 돈이지만, 뭐든 안된다는 이 상황에서 ‘네임드’아닌 내 책이 조금이라도 팔리고 있다는 상황이 며칠 전, 뇌가 금으로 된 소년이 손톱 밑에 걸릴 만큼의 마지막 뇌를 긁어내는 심정으로 다니는 체육관의 PT기한을 연장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걸 굳이 해야 하나? 라는, 자괴감의 꼬리가 길게 달라붙은 질문이 거기까지 가는 내내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지만, 역설적으로 현재의 상황에서 그것만큼 효율적인 활력소 및 원동력도 없다. 덕분에 불필요한 여러 가지를 줄였고 작년 가을 이후 쭉 좋지 않았던 건강도 회복했으며, 꾸준히 아침형 인간으로 살고 있다. 덕분에 머리도 아주 잘 돌아가서, 이런 상황일때 빨리 다음 책의 작업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 지경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건 물론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람들을 만나는 건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내 자리를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일텐데, 오히려 결과는 반대로 돌아온다.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 수록 내 자리가 없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자꾸 받는다.

너무 추워서 택시를 타고 들어오는데, 기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정의를 아냐’고 물어봤다. 택시 몇십 년 탔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을 입에 담는 기사는 처음이라 오백원 안 받고 내렸다.

 by bluexmas | 2014/03/22 00:42 | Life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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