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이해 (10)-비스트로와 양식당의 양식

수많은 카페며 레스토랑이 명멸하는 게, 홍대 지역은 비온 뒤의 대나무밭 같다. 망해도 금방 뭔가가 들어선다. 예전 것과 다르지 않다. 오늘도 늘 지나던 골목길에서 새 간판을 발견했다. ‘비스트로 OO-브런치·커피·이탈리안 푸드·와인…’ 잠깐, 이탈리안 푸드? 뭔가 어색하다. 비스트로는 프랑스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1814년 파리 전투 이후 러시아 병사들이 빨리 마시고 가야 한다면 외친 러시아어 ‘빨리(bystro-быстро)’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돈다. 19세기 말 이전에는 용례가 없으니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스트루이유(bistrouille)’라는 식전주에서 따왔다는 설 등도 있다. 사실 몰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개념이 규정하는 양식, 즉 음식과 분위기다. 한마디로 편하고 친근한 식당이다. 가격과 맛, 양쪽 모두 그렇다. ‘오늘의 요리’ 등이 담긴 메뉴는 종이보다 칠판에 써 놓는다. 이탈리아에서는 트라토리아가 흡사한 개념이다. “이탈리안 푸드”를 추구한다면 굳이 비스트로라 칭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이탈리안 비스트로’라는 개념이 국산은 아닌 듯 보인다. 검색에 수두룩하게 걸린다. 99% 미국에 있다.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보다 더 잘 알려진 콘셉트를 빈 것으로 읽힌다. 동조하기 어려운 의도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탈리안 같은 음식을 낸다. 코스라면 주연 노릇을 하는, 단백질 중심의 요리 위주다. 국물 흥건한 스파게티 일색의 파스타나, 시판 반죽을 허옇게 구운 피자 등 탄수화물 위주로 메뉴를 짜고는 감히 정통이라 우기지 않는다.

빌어다 쓴다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예의다. 요즘 비스트로의 개념은 1990년대에 출현해 재정립되었다. 오트 퀴진의 대안으로, ‘숨 좀 쉬며 먹자’는 의지에서 출발했다. 보여주기 위한 기교와 거품 낀 가격을 걷어내는데 초점을 맞췄다. 일단 만드는 사람이 즐거워야 먹는 사람도 행복할 거라는 믿음이 담겼다. 이브 캉드보르드(Yves Camdeborde) 등, 이름 뒤에 미슐랭 별이 딸려오는 레스토랑에서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수련을 받은 젊은 셰프들이 주도했다. 탄탄한 기본기 위에서 싹을 틔웠다는 의미다. 유행처럼 퍼져나가 운동(movement) 수준으로 자리 잡았다. ‘오트 비스트로’,‘현대 비스트로’ 등으로 불렸으며 강령에 가까운 원칙도 쌓였다. 경직된 듯 보이지만, 이성과 논리가 작용했다는 의미다.

원칙은 가격 거품 걷어내기에 초점을 맞췄다. 일단 고정된 가격에 같은 코스를 내는 메뉴(Prix Fixe)로 틀을 잡았다. 선택과 집중으로 재료의 가짓수를 줄이니, 재고 관리가 쉬워 손실이 줄어든다. ‘오늘의 요리’도 같은 의도다. 한편 재료 자체의 선택에도 신중을 기했다. 고기라면 직화 조리가 가능한 정육을 피했다. 운동을 많이 한 부위는 부드럽지 않아 저렴하지만 맛은 진하다. 이를 부드러워지도록 약한 불에 천천히 오래 조리한다. 뵈프 부르기뇽 등, 스튜나 조림(braising)이 비스트로 메뉴의 대다수인 이유다. 주방에서 시간을 미리 들이면 손님에게는 금방 낼 수 있으니, 비스트로의 개념에도 들어맞는다. 테린 또한 자투리 고기나 남은 음식 처리에 적합해 딱이다. 작아 맛이 금방 변해 버려야 하는 롤(roll)보다 큰 빵을 썰어 낸다거나, 화려하지 않은 인테리어 등 세부사항도 중요하다.

즐겨 가는 비스트로가 있다면, 이런 개념과 원칙을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다. 서울에서 비스트로의 개념은 위아래 두 방향으로 모두 고전중이다. 못 만든 파스타와 피자 범벅으로 바닥을 치는 곳들도 문제지만, 몇몇 자칭 “가스트로 비스트로”가 파인 다이닝의 선구자 대접을 받는 현실도 안타깝다. 프렌치 어니언 수프, 스테이크와 프라이, 크림 브륄레 등… 고전의 재현도 좋고 때로 조리 솜씨도 만족스럽지만 지루함이 가시지 않는다. 대접받는 이유가 ‘외국 음식이네, 신기하다’라는 생각은 아닌지 뜯어볼 필요가 있다. 수입차와 명품, 해외여행이 생활의 일부로 스며든 지도 오래다. 보다 더 깊은 창의력 또한 맛보고 싶다.

한편 재현의 세부사항도 따져보아야 한다. 현지의 메뉴를 고려 없이 그대로 가져올 경우, 비스트로의 핵심 개념에 반할 가능성도 있다. 요즘 부쩍 많이 쓰는 찜갈비나 삼겹살을 예로 들자. 서양에서는 잘 먹지 않는 부위이기에 싸고, 맛있으니 비스트로의 재료로 손색없다. 이를 서울의 비스트로에서 낸다면? 인기가 많은 부위이므로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없으니 가격이 올라간다. 우리 현실에서는 안 먹어 저장비용을 삼겹살에 추가로 붙인다는 돼지안심이 비스트로의 재료여야 맞다. 평평해지도록 저며(butterfly) 채소, 과일 등을 채우고 묶어 통구이하면 된다. 소금과 산을 줄여 균형을 깨가며 실체도 없는 “우리 입맛”에 맞추려는 시도보다 이쪽이 더 의미 있다. 셰프에 상관없이 똑같은 맛이 날 가능성이 높은 푸아그라가 비스트로에서 고가 메뉴로 자리 잡는 의미도 이해하기 어렵다. 못 낼 것도 아니지만, 굳이 낼 필요도 없다. 차라리 제대로 된 코코뱅 한 그릇이 더 낫다. 언제나 열린 가능성에 비해 선택지가 좁다.

레스토랑 스스로 정하는 개념은 손님에게 선택을 위한 큰 그림을 제공한다. 그 앞까지 가서 메뉴를 들여다보고 최종 결정을 하는 것도 좋지만, 가격 수준이며 분위기를 미리 알아 나쁠 게 없다. 손님도 즐기기 위해 준비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트라토리아보다 더 편안한 식당으로 오스테리아(Osteria)가 있다. 음식은 간단하다. 와인을 바탕으로 파스타, 그릴에 구운 단백질, 찐 홍합 등 손이 많이 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편 탁자는 공유를 위해 종종 넓다. 일종의 동네 밥집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테리아가 술과 음식 가운데 후자에 더 초점을 맞춘다면, 에노테카(Enoteca)의 중심은 와인이다. 명칭 또한 ‘포도주 창고(그리스어 Οινοθήκη=Oeno/Eno-Οινός+teca Θήκη)’에서 왔다. 지역 소규모 양조장 중심으로 시음 및 구입이 가능한 공간이다. 술, 특히 와인에 음식이 빠지면 섭섭하니 곁들이 음식을 내는 경향이 발전해, 트라토리아 수준인 곳도 있다. 한편 최상위 개념은 리스토란테(ristorante), 즉 레스토랑이다. 양식당을 ‘레스토랑’이라고 통칭하는 경향 때문에 혼동하기 쉽지만 가장 격식을 차리는 곳이라 보면 된다. 단품(a la carte)도 주문 가능하지만 그보다는 안티파스토(전채)-프리모(파스타, 리조토 등 탄수화물)-세콘도(단백질, 주요리) 등을 거치는 코스 위주다.

한편 프랑스에서도 레스토랑이 최상위 개념이다. 전채에서 탄수화물과 단백질 요리, 치즈와 디저트를 거치는 코스 구성 또한 같다. 그 하위 개념이 브라서리(Brasserie, 맥주 양조장)다. 종이에 찍은 메뉴와 테이블 보 등, 굳이 구분하자면 비스트로보다 살짝 고급스럽다. 1800년대 중반, 독일 접경 지역인 알자스로렌 출신들에 의해 비롯되어 자리 잡아, 양배추 절임과 족발, 소시지 등을 함께 먹는 슈크루트(chouroute)나 해물 요리가 중심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캐주얼한 개념은 카페(Café)다. 물론 커피를 중심으로 술 등 음료 위주지만, 베샤멜소스를 끼얹어 구운 햄 샌드위치 크로크무슈(Croque-monsieur) 등 요기를 위한 음식이 바로 카페의 대표 메뉴다.

 

 by bluexmas | 2014/02/22 13:16 | Taste | 트랙백 | 덧글(14)

 Commented by sf_girl at 2014/02/22 13:32 

혹시 tavern도 비슷한 범주에 들어갈까요? 뉴욝의 Gramercy Tavern은 원래 태번의 의미가 무색한 고급 레스토랑이고 태번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비슷한 느낌의 레스토랑도 꽤 있는 것 같아요. 비스트로나 오스테리아만큼 일반적이진 않지만요.

 Commented by 푸른별출장자 at 2014/02/22 16:15

Tavern의 원래 기원은 술과 간단한 음식을 팔던 집이었고

그러다가 숙박까지 겸했던 시절도 있고 (중국의 객잔 과 비슷한 역할)…

근현대로 넘어 오면서 중하층이나 학생 상대의 술과 음식이 나오는 선술집 정도…

옛 노래 ‘Those were the days’ 에도 친구들과 Tavern에 모여서 술마시며 청춘의 끓는 피를 노래 했다는 대목이 나오죠.

바로 히피 이전 세대까지도 그랬다는데…

그래서 한국으로 치면 7080 선술집 같은 분위기 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여유로운 그 세대와 그 세대의 수혜자들인 그들의 자녀가 옛날 분위기를 그리워 하며 조금 더 고급화 된 것이 현재의 그 정체모를 고급 Tavern 이라고 합니다.

 Commented at 2014/02/22 14:3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14/03/02 00:33비공개 답글입니다.

 Commented by 애쉬 at 2014/02/22 15:11 

비스트로의 어원은 여전히 안개 속이군요

러시아 진주군 설은 프랜치들에겐 끔찍한 일이겠네요 진위 여부를 떠나서 말이죠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3/02 00:34

네^^ 뭐 그걸 굳이 몰라도 상관은 없죠. 전 오히려 저런 부분에 많이 신경 안 씁니다…
 Commented by 푸른별출장자 at 2014/02/22 16:18 

비스트로에 이태리 음식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태리 식당이라면서 메뉴는 프랑스 요리들이 나오면 좀 난감하죠.

물론 이태리 요리하고 프랑스 요리들이 중복되는 것이 많긴 하지만…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3/02 00:34

네 뭐 알고 하면야 문제없는데 아무 생각도 없으면…
 Commented by 맹한 북극여우 at 2014/02/23 00:06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데, 요리하는 입장으로는 꼬꼬뱅이나 돼지안심을 구우면(한국사람들이 퍽퍽하다고 안좋아해서 브라인,수비드를 해도 안좋아하는) 장사가 될지 싶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3/02 00:35

어차피 이 땅에선 안됩니다 ㅠㅠㅠ 죄송해요 이렇게 말씀드려서. 근데 쉽지는 않겠죠. 사실 그렇게 저렴한 부위를 잘 조리해서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줘야 레스토랑 문화가 활성화될텐데…
 Commented by Nobody at 2014/02/23 00:23 

늘 블로그 글을 읽어왔지만, <외식의 품격>을 읽고 나서 이번 미식의 이해를 읽으니,

외식의 품격의 외전 같은 느낌이 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3/02 00:35

외전이라기보다 크게 보아서는 시리즈의 일환이에요^^ 언젠가는 책으로 내야죠.
 Commented by wonhee0118 at 2014/02/23 08:31 

언젠가 아주 폼나게 지어서 ‘거기 세련된 사람들! 다 이곳으로 모여!’ 라는 느낌의 비스트로를 봤었는데요, 메뉴에 알리오 올리오와 파니니를 당당하게 대표 메뉴로 써놓았더라구요. 그것도 넘어가기 힘들지만 가볍게 만원 후반대에 달하는 가격이 올라가있으니 원.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3/02 00:35

사실 그 정도면 카페 수준인데…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