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설날 전야

철컹.

분명히 그 소리가 맞았다. 화로의 철문을 닫는 소리. 아아.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또 일 년이 지났구나. 감격에 겨워, 그는 누군지도 모를 옆 남자와 악수를 주고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타다보니 이미 손목 밑으로는 뼈조차 남지 않았다. 괜히 혼자 머쓱해 팔을 내밀다 거두려니, 잠재적 악수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는 아예 얼굴 반쪽이 타고 없었다. 내 얼굴도 그렇겠지. 손목힘만으로 구덩이를 기어올라가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조금만 불을 좀 일찍 꺼주지, 손가락이라도 새로 돋아나게.

하지만 그만하면, 지옥의 인심치고는 후했다. 매년, 설 연휴 전날 다섯 시에는 반드시 화로의 철문을 닫았다. 아예 연휴기간 동안에는 지옥도 휴업, 차례에 맞춰 제사상이라도 먹고 오라는 배려였다. 화로의 철문을 다섯 시에 닫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새살이 충분히 돋아나도록 쉬어, 후손들을 멀쩡한 얼굴로 만나야 다들 조상이 지옥에 떨어졌으리라 근심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붙었다.

물론 그건 이미 지옥에 떨어진 선조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다. 잠재적 입주민, 즉 후손들을 위해서였다. 조상이 지옥에 떨어졌다는 걸 알면 후손들은 공포에 떤다. 일단 조상탓으로라도 자신 또한 지옥행이라 염려하는 것도 있지만,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핏줄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혹 조상이 지옥불을 맛본다는 걸 알고 개과천선해 천국으로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지나치면 곤란했다. 물론,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래서 그런 일은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지옥불에서나마 행복했다. 후손이 없으므로 아무도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옥은 넓디넓은데다가, 또한 예상처럼 배려심이 깊어 웬만하면 일가친척, 가족 등등을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하지만 종종 문제는 벌어진다. 원인은 전산착오, 아무래도 온도가 높다보니 전체 시스템이 불안정한 탓이었다. 평생 싸웠던 형제? 빚에 동반자살한 동거 커플? 지옥에서라도 마주치는 날이면 유황불에 손발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물고 뜯느라 정신이 없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얼음지옥을 신설해 서버를 그쪽으로 옮기자는 이야기도 나오는 모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며칠 동안은 조용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만 즐기기로 했다. 그래서 일단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렇다, 물론 끝없이 불구덩이에서 고통받지만 그래도 하루 네 시간 취침은 가능한 곳이 지옥이었다. 사실 이런 거주민을 위한 배려라기 보다, 다시 태울 살이 돋아나 더 고통받는 형국을 즐기고 싶다는 운영자 무리의 방침이었다. 어쨌든 그보다 항상 발이 덜 녹는 덕분에 먼저 숙소로 돌아오는 룸메이트 박씨는 이미 입고 갈 옷을 챙겨놓고 들떠 있었다. 그와는 15년째 동거중인데, 처음 9년 동안은 매년 함께 내려가자고 청했다. 여기 혼자 있어봐야 쓸쓸하기만 하고 먹을 것도 없으니, 자기 제사밥이라도 나눠 먹자는 제안을 했다. 이젠 세상이 바뀌어 홍동백서니 뭐니 다 없어지고 그냥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이나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하필 박씨가 좋아하는 음식이 치킨과 마카롱, 그가 좋아하는 것이라 처음에는 혹했다. 하지만 적어도 단 며칠이라도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의 신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머무르는 게 좋았다. 사실 굳이 박씨를 따라 나서지 않더라도 갈만한 곳은 꽤 있었다. 각종 복지시설 등에서 차리는 차례상 등도 그럭저럭 먹을만 하다고 알고 있어 무연고자나 그처럼 후손을 두지 않은 이들이 곧잘 향했지만, 역시 그마저도 딱히 내킬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설날 아침, 눈을 떠보니 정말 아무도 없었다. 일단 배를 채울 요량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누가 지옥 인심이 나쁘다고 그랬는가? 냉장고에는 그럭저럭 먹을만한 선도의 연어가 가득 차 있었다. 원래 이렇게 훌륭한 연어지만, 웰던으로 내놓아 문제가 될 뿐이었다. 조리를 의도적으로 대강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다시 한 번, 지옥도 살만한 곳이니까!), 지옥불의 화력 조절이 거의 불가능하다보니 미디엄이 불가능했다. 정말 비리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다들 열심히 먹었다. 거기에 그에게는 설 연휴 며칠, 이 연어나마 제대로 구워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화로는 어제 저녁 진작 닫았지만 그래도 지옥불, 온기는 여전했다. 그는 그나마 얕은 청소년용 불구덩이 375번으로 발걸음을 옮기고서는, 주방에서 가지고 나온 숟가락으로 땅을 판 뒤 은박지에 싼 연어를 껍질이 위로 가도록 놓고, 불구덩이 바닥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흙을 역시 숟가락으로 퍼담아 덮었다. 아무래도 숟가락인지라 자루가 짧아, 연어를 덮을 만큼 뜨거운 흙을 퍼올리다 보니 손가락이 다시 녹았다. 뭐 이쯤이야. 미디엄 이하로 익은 연어를 먹을 수 있다면 이쯤은 참을 수 있었다. 360일 가까이 불구덩이에서 뒹구르는 판에 뭐.

그의 직업은 음식…평론가였다. 물론 그만 그렇게 스스로를 일컬었다. 거의 대부분이 블로거, 몇몇 예의 바른 이들만이 ‘음식 칼럼니스트’라는 사실은 과분한 딱지를 붙였다. 그가 벌인 위선적 이중생활을 돌이켜보면 사실 블로거라 부르기에도 뭐한 존재였다. 늘 객관적인 식당 평가니 뭐니를 쓴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지만 물론 거짓이었다. 외국물 좀 먹었답시고 레스토랑 평가를 한다는 명목으로 비싼 곳만 골라 가서 공짜를 최소한 하나씩은 얻어 걸렸다. 아무도 모르던 시절, 쥐꼬리 만큼 주워들어 아는 덕분에 재미를 좀 봤지만 덕분에 죽어서는 지옥행을 면할 길이 없었다. ‘아니 뭐, 내가 엄청난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기업가나 정치인도 아닌데 고작 한 번에 와인 한두 병 얻어 먹은 것 가지고…’ 판결을 받을때는 툴툴거렸지만 막상 지옥에도 ‘끕’이 있다는 걸 알고는 이내 억울함을 접었다.

30분쯤 지난 다음, 다시 숟가락으로 흙을 파헤쳤다. 역시. 연어가 완벽하게 익어 있었다. 그는 맨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은박지를 열어, 손으로 살점을 발라먹기 시작했다. 아, 와인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 샤도네이면 딱 좋을텐데… “‘그러니까요, 고객님. 이 샤르도네 보디감이 꼭 소비뇽 블랑 같아서…” 기껏 한 두 번 와인 매장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고 뭐 엄청난 비리라도 벌어지는 양 책에 뻥튀겨서 썼던 생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아, 그 책 제목을 뭘로 지었었더라… <외식>이 들어갔던 것 같은데… 지옥에서 보낸 시절에 타버리도록 질려서, 또 연어가 맛있어서 다른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그, 마수의 샤르도네’라도 한 잔 마셨으면 좋겠건만… 그때 그 책만 내놓으면 뭐 좀 먹고 살까 싶었는데… 뭐 먹고 살만한 근처에도 못 갔지… 참 그걸 몰랐던 나도 딱했고, 그렇게 먹기 힘든 이승도 딱했고… 지옥은 하루 종일 조용했고, 그 가운데 연어도 제대로 익혀 먹었으니 그래도 이만하면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by bluexmas | 2014/02/02 01:25 |  | 트랙백 | 덧글(14)

 Commented by 랜디리 at 2014/02/02 02:25 

책을 쓴다는 건 업보를 늘려가는 일이었군요. ㅠㅠ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2/07 16:32

불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김구필 at 2014/02/02 04:00 

이반 데니소비치?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2/07 16:32

“오마주” 입니다 ‘ㅅ’

 Commented by 애쉬 at 2014/02/02 06:30 

아…삽화가 별로 기대되지 않는 글이네요^^ ㅎ

인육이 매일 구워지는 그 곳에서 굳이 연어를 따로 굽는….그런게 인간이고 요리이겠지요 ㅎ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2/07 16:32

연어는 미디엄 이하로 익힙니다.

 Commented by 새벽이야기 at 2014/02/02 07:49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2/07 16:33

네^^;;

 Commented by 코양이 at 2014/02/02 14:37 

역시 연어는 지옥에서나 웰던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2/07 16:33

연어에게 미안할 노릇이죠.

 Commented at 2014/02/03 16:1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14/02/07 16:33

비공개 답글입니다.

 Commented by 위장효과 at 2014/02/03 19:21 

이쪽으로도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신 듯 하오니 겸업도 고려를…

 Commented by bluexmas at 2014/02/07 16:33

뭐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