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 달리다가 죽을 뻔한 이야기
프리랜서를 가장한 반 백수 박철수(가명, 만 37세 9개월)은 오후 다섯시 경 보은 꾸러미를 들고 터덜터덜 집을 나서 우체국으로 향합니다. 원래 연말에 보냈어야만 하는 것들인데 병처럼 도진 게으름을 극복 못해 이제서야 챙기는 만큼, 더 이상 늦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금융쪽은 상대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우편쪽만 놓고 보면 들러본 어느 우체국/취급소만큼이나 친절한 염창 우체국의 택배 마감은 여섯 시이기 때문이었죠. 살짝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국가기관이 민영 사업체와 경쟁하네마네 이야기를 하지만, 참 우체국의 택배 서비스는 그래도 좀 더 친절하고 더 믿을만한 편이라 박철수(가명)씨는 언제나 우체국 택배만을 애용하는 시민입니다. 뭐 그렇다고 바른 시민이라거나 그런 주장까지 펼치려는 것은 전혀 아니고요.
우체국까지 약 1km쯤 되는 길을 추적추적 걸어가는 박씨, 어째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느낍니다. 딱히 ‘새해니까 운동을 열심히 하겠다’라는, 어차피 지키지 못할 작심삼일’성’ 목표를 세운 건 아니지만 지난 주에 크리스마스다 뭐다 해서 별 일도 없으면서 안했던 운동을 재개하겠다는 생각이었던터라, 그는 운동복 차림-폴리에스터 크루넥 운동복 셔츠에 플리스 조끼-이었습니다. 보통 밖에서 체면치레’적’ 5km 달리기를 마치고 집 앞의 헬스클럽에 가서 찔끔찔끔 웨이트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게 그의 하나마나한 운동 습관, 달리면 열이 오르므로 언제나 가볍게 입지만 오늘만큼은 날씨가 정말 심상치 않음을 느낍니다. 아니나 다를까, 땀 배출이 용이하다는 다공성 폴리에스터 조직 사이로 칼바람이 숭숭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길은 꽁꽁 얼어 붙었지, 바람은 춥지, 손에 꾸러미는 하나 가득 들었지… 그의 머릿속에 ‘이거 괜히 나왔나’하는 의구심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거의 뛰다시피 우체국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뿌옇게 가득찬 그의 의구심을 꿰둘어보는 관심법 또는 투시력을 지니셨는지, 우체국의 “프론트매니저(명패에 써 있는 공식직함)”님이 ‘아니, 이렇게 추운데 뭐 이렇게 옷을 얇게 입고 나왔대요?’라며 그의 의구심에 먹구름 한 덩어리를 더하십니다. ‘아 네, 달리기를 할 심산이라서요.’ 그의 쓸데없이 공손한 대답에 “프론트매니저(공식 직함)”님은 ‘아이고, 달리기 많이 하셔야 되겠네요~’라며 알듯말듯한 말씀으로 정감 어리되 딱히 마음에 와닿는다고는 할 수 없는 대화를 마무리지으셨지요.
보은꾸러미를 부치는 사이 모피를 세련되게 차려입으신 아주머니가 디지털 컨버터 신청 양식을 받아가시는 걸 보고, 그도 ‘아, 나도 그냥 디지털 방송 신청할까?’라는 생각을 문득합니다. 2012년 마지막 날, 싸구려 코스트코 프로세코를 마시면서 보신각 종소리라도 들어-아마 방송이 나왔더라도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디지털 방송을 신청해주십시오>라는 글자로 이미 케케묵은 45인치 DLP 화면을 가득 메웠을테니까요-볼까 간만에 틀었던 텔레비젼에서 어린 시절 ‘혹시 외계인과 교신하는 흔적은 아닐까’라고도 쓸데없이 생각했던 회색화면만이 가득했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그래서 열심히 보은꾸러미를 처리하시는 직원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물어보는 그, 역시 최대한 공손하게 돌아오는 대답을 통해 신분증이 없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마음을 접습니다. 하지만 124번을 통해 전화로도 신청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염창우체국은 역시 친절해’라는, 자신의 우체국 볼 줄 아는 안목에 쓸데없이 우쭐해서는 문을 나섭니다.
오오, 바람이 정말 찹니다. 그래서 철수(가명)씨는 잠시 생각합니다. ‘그냥 얌전히 헬스클럽에 가서 트레드밀이나 우물쭈물 걷다가 언제나처럼 찔끔찔끔 웨이트를 한 뒤 말도 안되는 플라시보 효과를 얻고 집에 돌아갈까?’ 그러나 갈등하는 순간, 왠지 “프론트매니저(공식 직함)”님의 ‘아이고, 달리기 많이 하셔야 되겠네요~’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충동적으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아, 300미터 앞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네요. 차도 없겠다, 목표지점으로 사인 30도 직선을 그리며 달려가는 그의 발밑으로 도로가 참 오지게도 미끌거리네요.
그가 체면치레’적’으로 달리는 5km 코스는 집을 나와 안양천 길을 쭉 따라, 이대목동병원을 반환점으로 찍고 천 건너로 다시 돌아 염창교로 연결됩니다. 그럭저럭 멀쩡하게 달려 병원에 이르니, 오늘도 로비의 그랜드 피아노가 자동연주를 한판 을씨년스럽게 벌이고 있네요. ‘그래도 아침 여덟시에 듣는 것보다는 훨씬 덜 을씨년스럽네’라고 생각하는 박씨, 별 것 아닌 일에도 쓸데없이 깊이 생각하면서 말도 안되게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습관은 새해에도 여전하네요. 이만하면 달릴만하다는 생각에 병원 앞 다리를 건너 안양천을 건넜는데, 갑자기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해가 완전히 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바로 물 옆을 달리기 때문일까요?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매서운 바람이 다공질 폴리에스터 셔츠를 뚫고 팔을 콕콕, 아프게 찌르기 시작합니다. 상황은 양천교 밑을 지나 갈대밭 사이로 난 보행로로 접어들자 더더욱 나빠집니다. 바람은 차, 길은 미끄러워, 거기에 콧물까지 눈물처럼 줄줄 흘러… 우체국 공용 컴퓨터 앞에 놓인, 마취제가 없다면 납치용으로 써도 될만큼 독한 싸구려 꽃향기가 배인 휴지쪼가리로 콧물을 닦아내지만, 이거야말로 진정 ‘가래로 막을 거 호미로 막는’ 상황인 것입니다. 아이고, 게다가 정신마저 아득해오네요. 갑자기 그의 뇌리로 불길한 예감이 번쩍, 스치고 지나갑니다. ‘으아, 여기에서 쓰러지면 나 오늘 그냥 가겠구나.’ 네, 맞습니다. 자전거길도 아니라 인적이 전혀 없으며 가로등도 없는 갈대밭 사잇길, 박씨처럼 제정신 아닌 사람이나 운동이랍시고 해보겠다고 깨작거리는 사정인데 정신 멀쩡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시민이라면 절대 그 날씨, 그 시간에 그 언저리를 얼씬거릴 이유가 없겠지요. 염창교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무리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눈밭을 가로질러 얼른 아리수 정수장 건너편 길로 올라갑니다. 한 정거장이라도 버스를 타고 몸을 녹인 뒤 운동을 하러 가겠다는 심산인 것이지요. 아아, 다행스럽게도 큰 길에 오르자 바람이 사뭇 잦아든 느낌이네요. 원래 폭이 좁아 안전하지 않은데 거기에 눈이 쌓인 뒤 얼어 가운데가 봉긋하게 솟아올랐으니 더더욱 위험한 육교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 길을 건너는 그, 버스를 약 1분간 기다리다가 녹색 버스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달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직전에 ‘1km 남았습니다’라는 나이키-아이팟의 메시지에 별 당위없이 충전한 기력 덕이겠지요.
딱 지나치기 불편한 형국으로 앞을 가로막은채 느긋하게 걸어가는 장정 세 명을 지나치자, 염창교 너머로 환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오 해냈구나.’ 역시 살아가는데 별 도움도 되지 않고 살 빠지는데도 전혀 보탬이 없는 체면치레’적’ 달리기는 헬스클럽 바로 앞에서 5km를 찍고 막을 내립니다. 기록은 찔끔찔끔 달려온 지난 8년 가운데 당연히 최악이겠지만, ‘그래도 뭔가 했으니 다행’이라는, 안하느니만 못한 긍정적인 사고를 월계관처럼 머리에 두르고 헬스클럽 문을 열자,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사근사근한 것으로 판명난 관장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며 인사를 건넵니다. 괜히 우쭐한 마음에 ‘와, 오늘은 진짜 달리기 하기 힘드네요’라고 말을 건넸더니, 그 관장 왈 ‘내가 평소에는 회원들한테 야외에서 유산소 좀 많이 하시라고 얘기하는데 오늘 같은 날씨에는 좀…;’
# by bluexmas | 2013/01/03 02:31 | Life | 트랙백 | 덧글(12)
해피뉴이얼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