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의 출산
월요일에 잉여 2호를 내보내고는 한 이틀을 그냥 자리보전으로 흘려 보냈다. 감기를 위장한 홧병이 온 것. 꽤 추운 날씨에 쏘다니며 꾸역꾸역 3차까지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간 것 치고는 그래도 아침에 무척 멀쩡해 놀랐다. 그래도 오늘 아침까지는 누워 있어야만 했지만.
미친놈처럼 대부분의 일을 끊고 책을 쓴다는 명목하에 백추처럼 지내고 있지만, 올해는 정말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한 해를 정말 의미있게 보냈는지의 여부는 연말의 잉여 출산과 직결되어 있다. 원래 목표는 덩치에 상관없는 잉여 1점의 출산, 그걸 못하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뭐 이 짓거리해서 얼마나 벌겠느냐만ㅠㅠ) 연말의 기분은 허무하디 허무하다.
잉여는 정말 생산하기가 너무 어렵다. 일단 하루살이처럼 먹고 사는 처지다 보니 당장 돈이 나오는 일이 아니면 시간을 쏟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간을 쏟아 부을 수 없는 일이면 당연히 마음은 더더욱 쏟아 붓기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잉여의 생산이라는 것에는 극도로 짧은 ‘시간의 창문(window of time)’ 또는 모멘텀’이 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일정 기간 안에 총력을 다해 끝을 보지 않으면 모멘텀을 잃어버려 곧 흐지부지 마음이 멀어진다. 작년에도 야심차게 머릿속에만 오래 묵혀 두었던 아이디어를 끄집어 냈으나 전체로는 약 30%, 그러니까 뼈대를 잡아놓은 시점에서 외부 상황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지금은 파일을 어디에다가 두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찾는다 해도 마음 차분하게 앉아서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만일 시작했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끝을 내야만 하는 이유는, 속에서 모멸감 비슷한 것이 계속해서 치밀어 올라 종내에는 이 모든 욕구를 잠식시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멸감 “비슷한” 것이다. 나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이 감정이 너무 많은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어 헤아릴 수가 없다. 어쨌든 계속해서 시간을 끌다 보면 ‘아 진짜 나는 왜 일을 한다고 지랄이고 또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돈도 한 푼 못 벌어다주는 이걸 만들어내고 있지?’라며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캐묻는다. 이 목소리가 커지고 메아리가 지나치게 울려퍼지면 GG를 쳐야만 한다.
그래도 올해는 운이 좋았다. 오랫동안 가지고만 있던 아이디어가 뚜껑을 열자 적절하게 흘러 나왔는데, 그 과정에서 형식을 완전히 갈아 엎으면서 일종의 자가학습을 할 수 있었다. 그 모멘텀으로 바로 2호로 넘어갈 수 있었으니 약 보름 안에 결국 두 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짓을 한 5~6년째 시도하는 것 같은데 기간에 비례한 생산력이 이렇게 좋았던 적이 없어 과연 앞으로는 뭘 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라고 말은 하지만 솔직히 뭘 기대해야 할지는 나도 전혀 모른다. 지금까지 말했듯 이건 철저하게 잉여력의 생산인데다가 여건이 형성되지 않으면 생산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언제나처럼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지 않지만, 가시적인 결과를 전혀 얻지 못하더라도 당분간은 괜찮다. 이 과정을 통해 배우는 것이 있으므로… 하지만 또 언젠가는 치지겠지.
말이 많았는데 결론은 1. 올해는 잉여를 무사히 생산하며 마무리한다; 2. 그래서 생활비가 떨어져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뿌듯하다. 쓰던 책 마저 열심히 쓰자.
끝.
# by bluexmas | 2012/12/14 02:20 | Life | 트랙백 | 덧글(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