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놔두자
그는 나보다 두 살이 많으셨지만 재수를 하셔서 학번은 하나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고로 내가 고3 이었을때 1학년이셨지. 요즘도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4당5락’이라는 말이 있었고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정말 넷과 다섯 시간 사이를 자가면서 입시 준비를 했다. 서울에서는 독서실도 많이 간다던데 경기도에서는 그저 죽으나 사나 학교에 붙어 있었으니 일곱시쯤 등교해 열두시쯤 하교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재수도 안했지만 어이없게 대입 시험을 두 번 보아야만 했던 세대라 여름에 1차 시험을 보고 가을의 2차 시험 준비 막바지 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분께서는 내가 들어오는 시간까지 깨어 계셨다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 가면 뭐 달라질 것 같지? 대학 가봐야 별거 없다’라는 말을 너무나도 열심히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교 1학년이라는 나이도 한없이 우습게 느껴지지만, 그것도 채 1년을 다니지 않은 분께서 고등학교 졸업후 재수까지 거쳐 가시고 나니 뭔가 큰 깨달음을 얻기라도 하신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루가 멀다하고 그것도 학교에서 열 몇 시간을 보내고 온 사람에게 하는 그 심보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나는 단 한 순간도 ‘대학을 가면 별게 있을거다’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대학은 (너무나도 당연하잖아?-_-) 공부하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고등학교 3년이 어떤 고생이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어쨌거나 대학이라는 것이 그저 그 다음 단계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머리 다 커서야 이러저러한 이유로 마지막에서 그만 뒀지만, 어차피 계속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아주 어릴때부터 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얘기가 길었는데, 결론은 그거다. 그런 이야기를 그 상황에서 대체 왜 하는 거냐고? 실제로는 거의 보지 못했지만 어른들이랍시고 ‘네 뭐 수능이라는게 이제 시작이죠, 앞으로 고생문 주구장창 열렸어요’라는 이야기를 읊어대는 분들이 많으셨다길래 생각이 났다. 내년이면 만으로 20년인데, 나는 매년 이맘때면 늘 그 생각이 난다. 아니, 사실 기분 나쁜 기억으로 가지고 있지만 이맘때면 더 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그래, 사실 정말 별거 없기도 없고 앞으로 더 힘든건 사실이다. 겪어보니 그렇기는 하더라. 근데 정말 그런거라면 굳이 지금 당장 ‘야 그러니까 꼭 그런 거야. 정신차려’라고 말해줄 필요 있나? 적당한 환상이나 기대 같은 것도 있어야 삶이 좀 덜 빡빡하니 잠시 좀 그냥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말은 하는 것보다 안하는게 더 어렵다. 내가 꼰대질로 쾌감을 느끼기 위해 말하는 거라면 그냥 닥치고 놔두자. 시간 지나면 먹는게 또 나이다. 벼슬 단 것처럼 행세하는 것도 이제 촌스럽다. 꼰대질이 나잇값은 아닐텐데?
# by bluexmas | 2012/11/12 03:14 | Lif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