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태번 38- ‘기믹’과 진짜 사이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하여간 <라 카테고리>에서 음식보다 충격을 더 많이 먹은 뒤 회복하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부정적인 이야기도 어느 정도여야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이 안되는 음식에 대해서는 글을 쓰는 건 에너지 낭비인 것 같아 그냥 입닥치고 있었다. 분명 향수 냄새를 풍겼던 웨이터부터 생선살을 직접 발라먹으라며 건네주는 나이프 등등, 정말 어이없는 수준이었다. 그 충격에 정말 몇 달을 어딘가에서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Tavern 38>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무 생각없이 가기 전날 검색을 하고는 너무 말도 안되는 곳에 있는 걸 발견하고 놀랐다.
명함에도 써놓기는 했지만 이곳의 셰프가 부숑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곳의 음식이 어떠리라는 예상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미국, 또는 캘리포니아식으로 해석한 프렌치 비스트로? 실내에 들어서니 주방에 올클래드 냄비가 잔뜩 쌓여 있던데 그것 또한 그 동네, 아니면 토마스 켈러 레스토랑의 영향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만 오천원짜리 코스가 있기는 했지만 대강 시켜놓고 죽치고 앉아 수다나 떨어 객단가 떨어뜨리는 강남 아줌마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접고 (수정: 2017년 8월 14일) 따로 두 종류의 음식을 시키고는 수준을 확인해보고 싶어 프렌치프라이를 추가로 시켰다.
발효빵이 아닌 비스킷, 그것도 드롭 비스킷이 나와서 ‘빵을 만들 사람이나 여력이 없나?’라는 생각을 했다. 비스킷은 남부의 음식이라 그 동네에서는 빵 대신 내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라도 사실 형태를 둥글게 만들어 굽는, 제대로 된 비스킷을 낸다. 그 비스킷이랑 드롭 비스킷은 만드는 난이도가 다르다. 오늘까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아마추어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주 못 굽기도 어려운게 드롭 비스킷이지만 그렇다고 잘 구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참고로 부숑에는 베이커리도 딸려 있고 그 요리책도 최근에 나왔다.
처음 나온 돼지 다리 룰라드는 밑에 사워크라우트가 깔려 있어 ‘슈크루트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아 문드러진 껍질에 퍼석하게 익은 속살을 싸서 먹으면 균형은 대략 맞고, 그 젤라틴의 끈적함(사람들이 느끼하다고 말할)을 케이퍼가 톡톡 터지며 덜어준다. 소스 또한 끈적한 껍질에 가세해서 부드러움을 더해주는데 단맛이 꽤 두드러져 그 의도가 궁금했다. 긍정적이었지만 적어도 2cm는 될법한 돼지털이 몇가닥 남아있는게 옥의 티였다.
프렌치 프라이는 아주 살짝 기름에 쩔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잘 튀겼다. 다만 소금이 조금 모자랐다.
파스타나 리조토 가운데 한가지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던 차에 올리브기름으로 콩피했다는 노른자가 궁금해 시킨 카르보나라는 실패였다. 생크림 소스라는 설명을 읽고도 시킨 내가 잘못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걸로 질척한 파스타에 노른자를 더하는 게 딱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크림소스가 없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은데 파스타 자체도 너무 익어버려서 열심히 먹기는 했지만 차라리 남기고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대망”의 디저트. 다른 디저트도 있었지만 “시그내쳐” 디저트라는 문구에 홀려 시킨 스모어는 초콜릿은 물론이거니와 마쉬멜로우와 그래엄 크래커 마저도 직접 만든게 아니라고 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스모어라는 게 신기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별로 그렇지도 않아 이게 딱히 “시그내쳐” 디저트여야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초콜릿을 뺀 나머지 둘 가운데 적어도 하나라도 직접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터라 모두 기성품으로 만든 이 디저트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구석에도 레스토랑이나 셰프의 정체성이 담길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란 노른자를 콩피하는 수준을 추구한다면 더 쉬운 마시멜로우나 그래엄 크래커 정도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적어도 한 번은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지난 달인가 확장 이전한 레스프아에서 전체적으로 ‘헐거운’ 음식에 안타까움을 느꼈는데 이날 먹은 음식의 조리만 놓고 본다면 그보다는 나았다. 기본기도 의지도 있다고는 생각하는데 스모어 같은 걸 시그내쳐 디저트라고 내놓는다거나 딱히 큰 의미를 찾기 어려운 노른자 콩피 등등을 놓고 보면 어디까지가 ‘기믹’이고 또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긍정적인 측면의 욕심이라고 생각하지만 메뉴의 덩치가 너무 큰 건 아닌가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 by bluexmas | 2012/10/18 18:55 | Taste | 트랙백 | 핑백(1) | 덧글(10)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4/03/10 14:51
… 터에서 마쉬멜로우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 김에 스모어를 만들어 먹었다. 마침 집에 굴러다니는 초콜릿을 처리할 구실도 필요했다. 예전 어느 레스토랑의 디저트로 먹었을때 지적한 것처럼, 스모어 자작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초콜릿까지 만들 필요는 물론 없으니 마쉬멜로우와 그래엄 크래커만 만들면 된다. 둘 다 믿을만한 알튼 브라운의 레시 … more
Commented by 애쉬 at 2012/10/18 19:28
음식만 팔아서는 청구서가 민망한지 ‘놀이 공원’이 되어야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나쁘지 않은 등가교환이지만…. 글쎄요
레스토랑, 음식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만…. 뭔지 잘 알수가 없네요 ㅎ
팔긴 파는데 뭘 파는 것일지…. 뭘 팔아야 하는 것일지
‘손님이 기대한 것’ 을 파는 것인데 정작 그게 뭔지를 정확하게 모르겠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2/10/19 18:31
Commented by 별일없이산다 at 2012/10/18 21:42
Commented by bluexmas at 2012/10/19 18:32
Commented by renaine at 2012/10/18 21:53
Commented by bluexmas at 2012/10/19 18:32
Commented by 랜디리 at 2012/10/18 22:30
Commented by bluexmas at 2012/10/19 1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