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더께
이런 씨바-ㄹ.
정말 각잡고 이런저런 책들을 봐야할 필요가 있어 광화문 교보로 향했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273을 타고 즐기며 갔겠지만 오늘 나의 상태는 그 버스의 여정을 느긋하게 또는 편안하게 받아들일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밤을 꼴딱 새웠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새벽 두 시에 일을 시작해서 꼬박 열 시간을 스트레이트로 일했다. 정오에 점심 약속이 있었으므로 그 전에 끝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끝내지 못하면 골치가 아플 가능성이 있어서 안절부절 써내려갔는데 막판에는 조금 여유가 생겨 아침에는 몽롱해 거의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꾸역꾸역 자아내는 걸 관조했다. 실로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왕 서점에 간 김에 내가 글을 쓴 혹은 썼던 잡지들도 들여다보려 했는데, 매너가 좋기로 글로벌하게 소문나신 우리 대한민국 이십 혹은 삼십대 남성 한 분께서 잡지 가판대에 책 한 권을 그대로 펼쳐놓고 숙독중이셨다. 대부분의 진짜 매너 좋으신 공짜 독자 여러분들은 돈을 내고 보지 않는다는 지극히 문명인다운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머지 책을 들고 보신다. 다른 공짜 독자, 또는 잠재적인 유료 독자로 하여금 다음 책에 부담없이 촉수하시라는 지극히 깊은 배려심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성분께서는 책을 가판대 위에 그대로 펼쳐놓고 보시고 계셨다. 나는 한때 원고를 좀 썼으나 이제는 어떠한 이유인지도 모른채 연락조차 하지 않은 어떤 잡지의 존재를 찾아 전 가판대를 헤매다 못해 그 남성분께서 가리고 계신 책 무더기 또한 살펴 보고자 그가 숙독중인 잡지를 검지와 약지로, 소금 한 “꼬집”을 정확하게 집기 위해 쓸만큼의 힘으로 정말 아주 살짝 들출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는, 마치 자신의 개인 서재에서 깊은 통독중이다가 방해라도 받은 것인양 실로 더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셨다. 그래서 나는 눈으로 화답했다 이런 씨바-ㄹ.
과업의 히말라야를 넘겼으므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바다 건너 오신 손님과 반주를 곁들여 고상한 점심을 먹고 이후 졸린 의식에 고농축 카페인을 쏟아 부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청산하지 못한 잠의 빚이 계속해서 방해하느라 고전했다. 왜 고농축 카페인을 쏟아 부어도 잠이 땀구멍을 통해 삐져 나오지 않는지, 그걸 잘 모르겠다. ‘스티키 번’ 같은데 끼얹어 굳히는 아이싱처럼 청산하지 못한 잠이 스멀스멀 삐져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손도 대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채 굳기를 기다려, 더께처럼 앉은 잠을 칼로 싹 긁어낸다면 적어도 남은 오늘 동안은 시달리지 않아 좋을텐데. 지난 번 여수 여행때 샀던 그, 자루에 못을 박아 고정했기 때문에 이천원이 아니라 이천 오백원이었던 남원 부흥 식도가 거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일테지만 잠은 여태껏, 나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이탈을 감행한 적이 없다.
그래서 몽롱했지만 정말 각을 잡고 몇 권의 책을 열심히 보았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그거다. 남들과 달라보이기 위한 시도가 결국 모두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클리셰가 되어버리고 따라서 그냥 그러기를 포기하고 평범한 것보다 더 열등해보인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할 수 있지만, 결국 그게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안 쓰니만 못하고, 사실 우리 모두는 쓰기 전부터 그게 아니라는 것조차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치를 누르도록 만드는 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니까 가만히 안 있어도 중간을 갈 수 있음과 동시에 노력했다는 자위라도 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강박관념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소주 한 병으로 얼큰하게 취해있다.
책을 각잡고 오랫동안 본 덕분에 나는 꽤 몽롱했지만 그래도 금요일이므로 홀로 회식을 열었다. 누군가 나를 찾아준다고 열과 성을 다해 기뻐하기 위한 준비도 채 끝내기 전에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거절한다. 부정의 메시지가 침묵이 아닌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그야말로 자위를 해보지만 그래도 거절은 거절인데다가 이 더럽고 치사한 감정의 저울이라는 것이 기쁨쪽으로는 한이 맺히도록 인색한 것 같아 나는 오늘도 집 앞 수퍼에서 투게더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네, 어서 옵니다. 그들은 언제나 어서 오시라고 말하고 나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으니 어서 온다고 대답한다. 그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은채 단지 ‘클래식’이라는 얄팍한 리본 하나가 더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투게더는 할인 대상 3,800원에서 정찰제 5,000원이 되었다고 한다. 역시 저 바깥쪽에 있는 수퍼마켓에서 리본 따위로 생색조차 내지 않는 구형 투게더를 사와야만 했다. 1,200원 아니라 120원이라도 쓸데없이 부담해야할 가격 차이가 쓴맛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저녁이기 때문이다. 그러게 어쩌자고 이 따위로 살겠다고 마음 먹었누 피붙이끼리도 외면하는 현실에서.
# by bluexmas | 2012/05/25 21:45 | Life | 트랙백 | 덧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