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zuo Ishiguro – 1인칭 화자의 압도하는 무덤덤함
다시 소설 읽기에 속도가 붙었다. 작년에 거창하게 계획을 세우고는 제인 오스틴의 <Emma>에서 제동이 걸린 뒤 다시 속도를 내지 못하고 그래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물론 다른 책들은 읽었지만…내 처지에 소설 읽기가 영 룸펜의 호사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다가 새해 시작과 동시에 책읽기에 발동이 걸려(매년 새해에 이렇다), 그 김에 잘 못 읽던 이 책에 손을 대게 되었고 곧 쭉쭉 읽어 며칠 내로 끝낼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은 지난 11월 중순의 미국 휴가/출장때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산 것인데 채 첫 장을 못 읽고 영화 <Help>로 눈을 돌렸었다. 영화도 그렇지만 소설도 아무런 정보를 찾지 않은 채로 읽어서, 대체 ‘donor’ 며 ‘carer’가 뭘 얘기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해 도입부가 지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두 달이 지나 다시 읽을 때도 종종 이 무미건조한 1인칭 화자의 발화가 때로 집중력을 떨어뜨리곤 했다. 그러나 찬찬히 읽어보면 이 1인칭 화자가 무미건조하게 거의 변죽만 울려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아무런 분위기 조성 없이 툭, 핵심 주제를 던져놓는 방식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라는 걸 곧 깨닫게 된다. 그렇게 따지면 양날의 칼이라고도 할 수 있을듯. 처음에 아예 집중을 하지 않은 탓에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을 못한채 읽다보니 거의 절반쯤에서 성별이며 다루고 있는 소재 등등을 한꺼번에 파악하고 꽤 큰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화자의 서술 방식이며 분위기는 큰 그림을 보았을때 이 소설에 대해 품을 수 있는 의문을 압도한다. 가장 큰 의문은 아무래도 이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그 분위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읽다보면 정말 자연스레 왜 이들이 장기 기증을 위한 복제인간의 운명을 그야말로 순종하듯 받아들이는지 납득하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이에 얽혀 몇 가지의 의문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는데, 사실 그것도 다 읽고 나서 떠오르는 것이지 읽을 때는 이 화자가 빚어내는 분위기에 말려 계속해서 페이지를 쭉쭉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름과 성장 배경의 간극이 빚어내는 환상 또한 한 몫 크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알려진 바대로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에 떠나 그 이후로 영국에 살았고, 그래서 스스로도 일본에 대한 유년시절 기억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위키피디아 참조). 그러나 책을 읽기 전에는 설사 그가 영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어딘가 모르게 일본스러운 정서-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추상적이지만 그런 것이 있지 않던가?-를 풍길 것이라고 짐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간결하고 무덤덤한 문장들을 읽어 나가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간극이 조금씩 좁혀지면서, 다 읽고 나면 그의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영국인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는 감흥만이 남게 된다. 아무래도 이러한 과정이며 감흥은 그의 이름이 불러 일으키는 환상 또는 선입견이 안겨 주는 일종의 덤은 아닌가 생각한다.
참,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비슷한 시기에 보았으므로 굳이 비교를 하자면 원작을 옮기기가 워낙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Moneyball>보다는 훨씬 나았다. 소설의 분위기-1인칭 화자가 자아내는 그것까지-를 백분 반영한 듯한 분위기 또는 영상미도 좋았고, 영화에서는 무덤덤하게 넘어간 두 친구의 죽음에 각각 방점을 찍어주는 것 또한 영화만의 매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헤일샴에서의 성장과정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에 비하자면 너무 약했고(나는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전부 헤일샴 시절에 빚져 나오는 부록 정도라고 생각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키어라 나이틀리-발음을 찾아보니 ‘키어라’, 자음접변;;;까지 따지면 ‘키아라’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키이라’지?-_-;;-를 좋아하지만 계속해서 미스캐스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bossy/bitchy/manipulative 한 역에는 얼굴, 몸매 모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랄까. 좌우지간 책과 영화를 연이어 보고 나니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우울해져 그 주 내내 좀 힘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다시 소설 읽는 재미를 붙여, 빠르게 다음 책을 집어 들었다. 예전에 소개한 이 목록대로 책을 계속 읽기는 할텐데, 열 권씩 묶은 가운데 그 안에서 조금씩 융통성을 주는 방향으로 읽는 것이 조금 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남자작가 다음은 여자 작가, 미국 다음은 영국, 근대 다음이라면 현대… 뭐 이런 식이다. 그래서 다음 책은 카슨 맥컬러스(Carson McCullers, 1917~1967)의 <Clock without Hands(1967)>이다. 언젠가 글을 올린 적 있는 금성출판사 세계 문학전집 64권의 64권째라서 기억하고 있는데, 문장이 복잡하지 않아 굉장히 빨리 읽힌다. 계속 탄력을 받아 읽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책읽기만큼 성취감을 주는 게 없다.
bluexmas101, 가즈오이시구로, 나를보내지마, 영어소설
# by bluexmas | 2012/01/30 01:54 | Book | 트랙백 | 핑백(1) | 덧글(12)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2/01/30 01:54
… Absalom, Absalom! William Faulkner8. Never Let Me Go / Kazuo Ishiguro9. Clock Without Hands / Carson McCullers10. Blankets / Craig Thompson 원래 계획은 101권의 목록을 다 짠 다음 한꺼번에 올리는 것인데, 한꺼 … more
희망이 사치라, 분노도 부질없고.
정작 작가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오히려 그게 독자인 저에게는 감정적으로 엄청난 blow..ㅠㅠ
그리고 저도 Carson McCullers의 The heart is a lonley hunter 조만간 읽으려고 벼르고(?) 있는데 Clock withouth hands 감상글 기다릴께요^^ 좋으면 저도 요거부터 시도해볼까봐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