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동] 차우기-셰프 없는 셰프 음식
길게 말하기도 내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고 생각하니 변죽 울리지 않고 그냥 요점만 말하자면, 사진 속의 저 펜네 그라탕에는 셰프가 없었다. 저 파스타는 얼마였을까? 27,000원이었다. 가격표만 놓고 본다면 농담이 아니라 정말 미슐랭 셰프급이다. 열 가지 이상의 음식이 나오는 미슐랭 별 두 개짜리 테이스팅 코스가 180달러였다. 쉽게 계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파스타는 온몸으로 셰프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동네 파스타집, 아니면 양식이 아니더라도 만드는 사람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의 차이는 무엇보다 철학 또는 콘셉트이고 그 다음으로는 조리다. 조리를 철학 뒷편에 내세우는 건, 철학이 있는 세프라면 당연히 조리는 기본으로 완벽하게 갖추고 있을게 분명하고, 기능적인 측면의 조리는 철학 없어도 완성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모두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셰프의 음식은 비싼 가격을 달고 손님을 기다린다. 이미 많은 전제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음식의 이름은 ‘게살 펜네 그라탕.’ “요즘 제철”인 게살을 넣고 만든 것이라 했다. 그 “요즘 제철”이라는 의미는 구하기 쉽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질이 여느 때보다 좋다는 의미일까? 전자와 후자를 함께 의미하지만 대부분은 후자쪽에 비중을 두므로 그렇다고 전제를 해보자. 제철이라 질이 좋다면 해산물의 경우 날로 먹는 것이 가능하다거나, 만약 그렇지는 않은 정도라면 가급적 많은 손을 거치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하고, 많은 “셰프”들이 그러한 방법론을 적용하고 있다. 가장 신선하면 회나 카르파치오로, 그 다음이라면 구워 먹지 않던가? 정말 그런 정도로 질이 좋은 게살-갑각류 가운데에서도 맛이 섬세한 축에 속하는-을 크림과 치즈에 범벅해서 내는 것 부터가 나는 셰프로서의 고민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게살이 아무리 제철이라고 해도 송로버섯은 아니다. 무슨 마법의 재료처럼 날 것을 그냥 슥슥 저며 얹는 것만으로 음식이 업그레이드 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셰프는 1+1=3까지는 아니더라도 2.5는 가능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1+1=2에 그치는 수준은 동네 파스타집에서도 얼마든지 맛볼 수 있다.
만약 콘셉트가 별로라면 조리를 잘 해서 만회할 수 있다. 클래식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평을 받는 “셰프”들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레스프와의 임기학 셰프도 그런 부류라고 생각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살은, 인색하지 않게 담기는 했어도 대부분 질겼다. 팬에서 한 번 불맛을 보고 치즈를 녹이기 위해 브로일러/오븐까지 거쳐 나온 게살이 어떻게 안 질길 수 있겠는가? 최악의 경우 데친 게살을 그냥 파스타에 더하기만 한 뒤 치즈를 녹여 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수준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셰프는 음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가격도 마치 철학을 전달할 것 같은 전제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먹어보니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셰프 대접을 받고 싶다면 셰프처럼 음식을 했으면 좋겠다. 같은 수준의 음식을 하고 비슷한 가격표를 붙여 놓지만 코스를 내네 어쩌네 하면서 정체성이라도 찾는듯 고민의 흔적을 보여주는 젊은 셰프들이 차라리 더 고무적이라고 생각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길게 말하기 싫으니 짧게 덧붙이자면 이미지 또는 스타일 포인트가 아니라면 한옥 개조는 콘셉트는 물론, 손님의 배려를 떠나 주방 자체의 능률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선택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P.S: 그런 수준의 와인을 그런 가격에 ‘하우스’ 딱지 붙여 그만큼 줄거라면 아예 이름을 안 밝히는 편이 낫다고 본다. 마시면서 본전 생각하지 않게.
# by bluexmas | 2011/12/23 10:46 | Taste | 트랙백 | 핑백(2) | 덧글(4)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1/12/27 00:31
… 이 글을 쓰고 나서 나는 무시 못할 수준의 자괴감에 시달렸다. 고백하건데 나는 정말 저런 수준의 음식을 먹게 될 거라고 생각 못했다.아마 그랬더라면 가지 않았을 것이 … more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1/12/31 17:45
… 홍대앞(20회) | [홍대앞]청키면가-음식의 원형에 대한 회의 1위: 일상(175회) | 이달의 납품 현황 2위: 음식(100회) | [재동] 차우기-셰프 없는 셰프 음식 3위: 영화(6회) | <북촌방향>과 뜬금없는 시뮬라크르 4위: 창작(6회) | 멸치 마라톤의 내막 5위: 도서(3 …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