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들의 은퇴
은퇴하는 냄비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사진 찍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빛이 괜찮게 들어오는 토요일 오후였다. 맨 가운데와 그 오른쪽의 냄비는 부모님에게 빌렸던 거라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그에 딸린 이야기조차 가물가물하니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시간 동안 내 옆에 있었다. 그래봐야 사실은 채 십년도 안 되기는 했다. 아니다, 어쩌면 사근동에서 자취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될지도 모르니 그보다 오래된 것일지도? 그것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정말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여간 그런 정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냈기 때문에 이 냄비들을 은퇴시키는 마음은 클리셰처럼 시원섭섭하다. 이 블로그, 특히 밸리에 올린 음식 거의 전부는 바로 이 냄비들의 수고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오후부터 늦은 밤, 또는 새벽까지 와인 두 병씩 마셔가며 레시피와 함께 씨름하던 그 토요일에 이 냄비들은 내 최고의 친구며 도우미였다. 뭐 아직도 음식 잘 만드는 것과는 지구에서 명왕성까지 멀지만 그래도 매운 스팸 넣고 간신히 카레나 끓여 먹던 수준에서 한 번은 해 먹어봤답시고 베샤멜 소스가 어쩌고 오소 부코가 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읊어대는 유사 직업인이 되는데 이 냄비들이 지대한 공을 세운 것만은 사실이다.
매정하게 성능만 놓고 보자면 모두 형편없는 녀석들이었다. 당연히 바닥에만, 그것도 체면치레하듯 아주 얇게 겹을 붙여 놓아 정말 효율과는 거리가 멀었고, 플라스틱 손잡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위에서 베샤멜 소스를 들먹였는데, 정말 거의 항상 태울뻔한 위기에서 간신히 살리곤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참고 쓴 건, 솔직히 말하자면 이 냄비들을 아주 사랑해서라기 보다 제대로 된 대안을 들여놓기에 돈도 실력도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 사진 한 잔으로 알량하게 은퇴를 대신한다. 뭐 사람이나, 하다못해 난쟁이 midget이라도 되었으면 땡처리하는 줄 알고 여러병 샀으나 아니어서 스스로의 과소비에 눈물 흘리게 만든 탈리스커라도 한 병 깠을 것이다. 부모님께 빌린 건 벌써 돌려드렸고, 맨 뒤의 가장 덩치 큰 놈도 방출했는데 나머지는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 공간이 부족하니 버리는 게 상책이기는 한데, 그게 또 말처럼 쉬워야지. 라면을 더 맛있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양념 또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냄비가 있다면 그거라도 그냥 고이 간직할텐데 솔직히 그런 잠재력을 가진 것도 하나 없기는 하다. 어쨌든 수고 많이 했고 고맙다.
# by bluexmas | 2011/12/19 23:58 | Taste | 트랙백 | 덧글(14)
제가 이사 오면서 은퇴식도 없이 막 버린 냄비에게 갑자기 미안해지는걸요.
울컥ㅠ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