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770 / 한국 영업인 협회 스팸메일
1. 누군가 ‘회사 몇 년 다녀 뭘 얻었느냐?’라고 물어보면 나는 주저없이 사진의 저금통을 들어 보여줄 것이다. 회사를 다녔던 기억 또한 가물가물한 이 시점에도 저금통은 부지런히 나의 잔돈을, 미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꿀꺽꿀꺽 잘도 집어삼켜 모아주고 계시다. 어찌나 유용한지… 이력서에 한 줄 ‘미국 애틀랜타 모모모 회사 재직 2005~2008’이라고 쓰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도움을 준다. 솔직히 알게 뭐냐, 내가 미국에서 떡을 팔다 왔는지 건축 회사에서 일을 하다 왔는지?
생각해보면 나는 굉장히 묘한 사각지대에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름 양키들 사이에서 10년 가까이 살아서 영어 읽고 쓰기도 웬만큼 되고 아이비 리그니 뭐니 하는 학교는 아니어도 이름이 나름은 알려져 있는 학교에서 박사는 공부하다 그만 뒀지만 석사 두 개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 마주치는 사람들은 심지어 내가 뭘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고민이다. 가끔은 내가 티를 더 내야 되는 걸까? 라고 생각할 때도 많다. 아무래도 현대 사회에서는 겸손이 병인듯. 이런저런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정말, ‘지금 저걸 안다고 떠들어대고 있는거냐?’라는 생각을 안고 돌아올 때가 많다. 물론 그게 어디에서 또는 얼마만큼 공부했는지와 딱히 상관있다고 생각은 안 한다. 많은 사람들은 관심 또는 호기심을 사치처럼 생각한다. 먹고 살기 바쁜데 뭐 그런 데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 또는 그저 죽어라 주입식 교육만 받아서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나를 재수없다고 하겠지만… 이젠 뭐 그냥 재수없고 마는 편이 낫지 않나 싶다. 겸손이 병인 사회에서 강박처럼 겸손 떨어봐야 아무 소용도 없고, 그런다고 해서 재수없다는 소리 안 들을 것 같지도 않다. 열에 여섯 재수없다고 생각하나, 일곱 생각하나 나에게는 별 차이 없다. 그냥 “맛집”이나 가고, 고기 구우면 육즙 가둔다고 떠들어 대고, ‘아 역시 정통 카르보나라는 생크림과 베이컨으로 진하게’라고 흥건한 국물에 공깃밥 말아 먹으면서 좋아하시길. 나도 그냥 나 잘난 맛에 그런 거 비웃고 살테니까.
참, 제발 부탁인데 저온조리를 “분자요리”에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공포장에 immersion circulator를 써서 그렇지, 그런게 없던 시절에도 저온조리는 가능했다. 요즘 나도 집에서, 청계천에서 16,000주고 산 열탕기(?)로 저온조리 하고 있다. 음식을 가르친다는 분께서 그러면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저금통은 진짜 건축자재인 유리블럭으로 만든 것이다. 똑같은 건 아닌데, 이런 유리블럭을 쓴 건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피에르 샤로(Pierre Chareau)의 ‘Maison de Verre(문자 그대로 유리의 집)’이다. 길게 쓰기 귀찮아 한마디로 하자면 ‘절제하면서도 우아’하다. 내부 사진은 찍을 수 없었고, 파사드 사진 찍은 게 몇 장 있는데 잘 못 찍었고 찾기 귀찮으니 그냥 인터넷 뒤지면 좋은 사진들 많이 나온다.
하여간 이 저금통에 남는 잔돈을 열심히 모으면 일년에 두 번 정도 쏠쏠하게 재미를 본다. 오늘 모인 금액은 104,770원, 아쉬운 소리 너무 많이 하고 다녀 불편한 심정인 요즘 마음은 물론 현실의 측면에서도 위안이 되는 금액이다. 왠지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재벌가의 따님도 장을 보러 오신다는 신세계 지하 식품 매장에서 제주도산이라는 빨간 키위를 사왔다.
2. 한국 영업인 협회는 스팸 메일을 전투적으로 보낸다. 오늘도 한 시간 동안 똑같은 메일을 세 통 받았다. 26살에 백억 부자가 되셨다는 훌륭한 분의 이야기던데, 연말을 맞이해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강연인지 뭔지를 하니 만 원인가를 내고 참가하란다. 26살에 백억씩이나 버신 분이 뭘 회비를 받아, 그냥 자비를 베풀어 공짜로 하시지? 성공했으면 됐지 그 성공의 비결까지 팔아서 어차피 똑같이 될 수 없으나 성공에 목마른 사람들 푼돈까지 챙기는 걸 보면 좀 너무한다 싶을 때가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책 읽어도 안 되는 사람이 더 많지 않나? 그리고 그건 능력의 문제가 아닐 확률이 더 높다, 안타깝지만. 교보에서 정말 아무 생각없이 집어든 책은 무슨 젊은 광고 천잰가 뭔가 하는 친구의 이야기였는데 보니까 모 그룹 회장의 아들이더라. 당신이 그냥 먹고 살만한 중산층 집안의 아들로 적당한 회사에서 적당한 월급을 받고 그럭저럭 일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런 책을 읽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오해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오난독 답글이 가뜩이나 안 달리는 답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마당에 귀찮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확히 하자면 이건 ‘네 분수를 알라’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아닌 건 그냥 아닌 거 아닌가? 개천에서 더 이상 용 안난다.
참, 난 백억은 커녕 일억도 벌고 살까 싶지만 그래도 영업에는 관심 없으니 한국 영업인 협회, 스팸메일 그만 보내시라.
# by bluexmas | 2011/12/17 01:00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