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의 털모자
늦은 오후에 잠시 외출을 했다. 조용하게 쳐박혀 있기가 지겹다면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면 된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다시 조용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니까. 일요일 오후 백화점, 특히 지하는 사람으로 드글드글하므로 가장 효과있는 장소다. 아무 생각없이 윗층을 누비고 다니는데 머리에 맞는 털모자를 발견했다. 머리가 큰 사람에게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사실 모자가 맞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맞으면서 어울려야만 한다. 그런 모자를 찾을 확률은 그렇게 높지 않다. 그래서 발견할때마다 산다. 그건 어찌 보면 실용적인 이유보다, 그냥 아직도 맞는 모자가 존재한다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감사 표시다. 머리 큰 사람에게 맞으면서 어울리는 모자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의미의 덩어리다. 그래서 사실은 한 스무 개 정도의 모자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3/4는 써 본 적이 없다. 어울려도 머리가 작은 사람에게 그렇듯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발견한 모자는 크다 못해 남았는데, 이 정도라면 거의 아무도 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용적인 색깔과 그렇지 않은 색깔 둘을 놓고 머뭇거리다가 실용적인 색깔을 골랐다. 이런 모자를 사는 것 자체가 실용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데 거기에서 실용적이기를 바라는 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따뜻하기는 한데 방울이 워낙 커서 좀 무거웠다. 집이 따뜻해서 바깥도 따뜻한 줄 알고 가을옷을 입고 나갔더니 추웠던터라, 모자를 충동구매하기에는 제격인 상황이었다. 사실 모자에 그친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세일중인 패딩들을 만지작거렸으니까. 그래 패딩도 필요하기는 하다. 마지막으로 패딩을 산 게 한 5년 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날 한 번 더 가을옷을 입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 백화점의 지하는 공사를 위해 곳곳을 막아놓아 마치 쥐들이 길찾기 놀이하는 미로같은 느낌이었다. 이태원으로 건너가려고 143번을 기다리는데 백화점 앞 도로는 이미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서민들은 모조리 3차선으로 뛰어가 버스를 탔다. 이짓은 일곱살때도 했던 것 같은데 서른일곱 살에도 계속 하고 있다. 커피를 두 잔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들깨수제비를 먹고 들어올까 하다가 사리곰탕면을 대신 샀다. 따뜻한 국물이 생각났다. 그러나 집에 어머니가 보내주신 아주 좋은 미역(“어머니가 해녀라 직접 따서 말렸대”)이 있다는 걸 생각해내서 잽싸게 불려 참기름에 볶아 국을 끓였다.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오는 걸 지켜보았다. 얼른 이걸 먹고 기운 내서 우리 아기 젖을… 아 이거 아니지;;; 단백질을 보충하고자 두부를 구웠는데 마지막에 가츠오부시를 뿌린 게 패착이었다. 비린내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났다. 이제 일을 해야 한다. 일단 음악을 틀어놓고 마음부터 달랜다. 밤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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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bluexmas | 2011/12/05 00:20 | Life | 트랙백 | 덧글(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