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Do you have any cap for this?”
‘얼타 Ulta’라는 화장품 매장이 있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도 헤어 에센스를 사러 들르던 곳이다. 마침 마지막 날 묵었던 모텔 옆 몰에 있길래, 공항에 가기 전에 잠깐 들러 같은 제품을 찾았다. 좀 긴 얘기지만, 업체에서 같은 제품에 다른 상표를 찍어 판다는 걸 알아 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쨌든 딱 두 병이 남았는데 하나에는 윗뚜껑이 달려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없었다. 뚜껑이 없는 것까지 사야될지 잠깐 고민하는 와중에, 옆에 딸린 문에서 여자 직원 하나가 나온다. 얼굴은 물론 온몸으로 ‘나 일하기 싫소’라는 아우라를 발산한다. 한 2분쯤 그대로 고민하다가 계산대로 가져가서 묻는다. 이거 뚜껑 좀 없냐고. Sorry, we don’t have it. 미안하지만 없단다. 그리고는 끝. 솔직히 미안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언제부턴가 ‘Sorry’나 ‘쓰미마셍’, 그리고 ‘죄송합니다’까지, 모두가 다 안 미안한데 억지로 미안한 척 하는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다들 습관적으로 내뱉다보니 미안함의 기운 같은 건 날아간지가 오래다. 뚜껑이 있는 것만 계산해가지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찾아보면 정말 뚜껑 하나 없을까? 하나라도 더 팔고 싶지 않을까? 아니면 ‘아 미안하다 여분의 뚜껑이 없다. 대신 10% 깎아줄테니 사라’라도. 할인을 받고 싶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그러고 말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원래 열 시부터 여는 매장인데, ‘홀리데이’랍시고 아홉 시부터 연단다. 그래서 그렇게 ‘일하기 싫소’라는 아우라를 풍겼던 건가? 돈 더 벌려고 한 시간 일찍은 열면서, 뚜껑 하나 못 찾아주는 건 또 뭘까.
그 나라가 원래 그랬는지 아닌지 솔직히 나도 좀 가물가물했다. 근 삼 년만이니까. 그래도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힘들었다. ‘아, 이 나라도 바닥으로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 무지와 무관심은 사실 다른 개념인데 어느 경지에 이르면 비슷해지고 또 다르더라도 서로를 먹여가며 함께 덩치를 불려 다른 것들을 잠식해버린다.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많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긍정과 부정이 있는데, 언제까지는 긍정이 우세한 까닭에 그럭저럭 살아왔지만 이제 그 반대의 상황이 된 듯한 느낌.
뭐하러 갔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혹 특정 과업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받았느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랬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글쎄, 정말 뭐하러 간 걸까. 거의 모든 운전 여정이 예정한 것보다 꼭 두 시간씩 더 걸렸다. 그냥 두 시간도 아니고 한계령보다 백만배는 더 꼬불거리는 길을 발목이 끊어져라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30킬로미터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도로로 두 시간이었다. 열 몇 시간씩 운전을 하면서도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잔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목적지를 채 한 시간도 안 남겨두고 파도가 무섭게 몰아치는 도로의 갓길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무서워서 잠도 잘 안 오더라. 그때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뭐하러 온 걸까. 캘리포니아가 아무리 남북으로 긴 주라고 한들, 북캘리포니아가 그렇게 춥고 황량한 느낌인지는 정말 몰랐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도로를 덜덜 떨며 달리면서 생각했다. 정말, 뭐하러 온 걸까.
다니는 내내 스스로에게 그럴싸한 대답을 지어내보려 했는데 어떤 것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사실은 재고의 여지도 없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인정하기가 싫어 뜸을 들였다. 나는, 아직도 남아있던 기대를 확인사살하러 갔던 것이다. 물론 그 기대는 단순히 그 땅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이곳, 그러니까 내가 나고 자란 땅이 아닌 어딘가에 막연하게 품고 있는 그 모든 기대의 대표 단수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때 쫓기듯 떠나면서 숨겨놓았던 기대의 나머지를 이번에 찾아 가지고 다니면서 조금씩 뜯어 길에 버렸다. 이제 동경이나 막연한 기대 같은 건 사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 결국 어디에서나 사는 건 비슷하다, 언젠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냥, 나를 즐겁게 만드는 온갖 것들 사이사이에 쭉정이처럼 숨어있는 거슬리는 것들의 존재가 이제는 너무 두드러져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그것들의 존재가 정말 두드러지게 된 건지, 아니면 내가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규명하는 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굳이 책임소재를 따질 게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국 어디에서나 비슷하다’는 건 한 편으로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확신일 수도 있지만, ‘다른 곳을 찾아봐야 별 볼일 없다’는 굴레와도 같다. ‘사는 건 다 비슷하다’라는 결론을 내려버리면 모든 생동감을 지닌 것들이 졸지에 무채색으로 굳어버리는 환상을 보게 된다. 기쁨이 슬픔이 될 수 없고 희망이 절망이 될 수 없는데, 이런 결론을 내려버리고 말면 정말 그런 것 같아진다.
처음에는 ‘매일매일 업데이트를 하리라’라고 생각했지만 며칠 지나고 나니 시간도 없을 뿐더러, 아예 이런 기회에 정신은 물론 물리적으로도 쓰지 않아야 휴가 아닌 이 휴가가 조금이라도 휴가 같아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최소한의 기록만 했다. 돌아오고서도 일주일이나 지나서 컴퓨터 앞에 앉으니 이 짓거리 자체가 너무나도 낯선 게, 소기의 성과는 이루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 또 다시 시작이다,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은 채로. 너무나도 어색한 것들이, 다시금 친숙해질 때까지.
# by bluexmas | 2011/11/29 01:18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