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라 불리고 싶지 않은 이유
오랜만에 덧글을 달아주신 분이 있어 블로그에 놀러갔다가 ‘블로거는 모욕적 칭호인가’라는 글을 보았다. 두 경우를 소개하셨는데 그 두 번째 어째 나인 것 같아^^ 덧글을 달아 내 의견을 밝히려다 길어질 것 같아 아예 내 블로그에 글을 쓰기로 했다. 나 또한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이 말해주겠지만 노파심에서 밝혀두자면 그 분이 쓰신 글에 대한 논박 뭐 이런 건 아니다.
1. ‘블로그’와 ‘블로거’
그 분의 포스팅 마지막에 ‘만일 블로그가 인격이 있다면 하루 죙일 장터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나물/생선 팔다가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집으로 오는 길에 마주친 반가운 아들/딸이 ‘아씨 엄마/아빠 부끄러우니까 길에서 아는척 말란 말여’라고 일갈하는 걸 들은 기분일듯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원래 다른 사람 블로그에서 그대로 인용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지 않는데 잘못 옮기다가 왜곡될 우려가 있어 그냥 인용을 한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모르겠는데, 나는 내 블로그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 아니, 나는 내 블로그를 사랑한다. 나에게 있어 블로그를 한다는 것과 블로거로 불린다는 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블로그질 아니면 블로깅을 사랑하지만 블로거로 불리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게 블로그인데 내가 어떻게 블로그를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하고, 내가 왜 블로거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2. ‘블로거’라는 명칭이 부여하는 정체성의 문제
아직도 뻑하면 매체에서는 ‘네티즌’ 또는 ‘누리꾼’이라는 명칭을 들먹인다. 물론 컴퓨터나 인터넷 사용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그 사용이 너무나도 보편적인 시대에는 사실 저러한 명칭 또는 범주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 범위가 넓어져 나 개인적으로는 ‘트위터리안’이니 ‘블로거’니 하는 명칭도 마찬가지로 다가온다. SNS를 좋으나 싫으나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현실에서 이러한 명칭이 특히나 내가 듣는 것처럼 일종의 직업적인 딱지를 붙이는 데 쓰일 때 나는 굳이 달가와 해야 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블로그는 행위의 매체를 규정하지 행위 그 자체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블로그라는 것이 일반적인 명칭으로 자리잡기 훨씬 이전에 하이텔이나 싸이 월드에도 무엇인가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하이텔러’나 ‘싸이월더(또는 ‘월디안’)’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블로그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굳이 ‘블로거’라고 불러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블로그에 하루 평균 두 편의 글을 쓴다. 아직도 아침 안 먹는 사람이 많으니 하루에 두 끼만으로 사는 사람도 많을 텐데, 그 사람들이 밥을 먹는다고 해서 ‘식사가’라는 명칭을 쓸 수 있을까? 그렇게 부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렇게 부를 때 그건 직업적 호칭이 아닐 확률이 높다.
3. 보수의 문제
이건 의뢰로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만약 내가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으로 보수를 받아 먹고 살 수 있다면 나를 ‘블로거’라고 부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당연히 이 블로그를 통해 0원을 번다. 누군가는 ‘아 너는 이 블로그에 글을 써서 사람을 알렸고 책이 나오면 홍보도 하고 그러므로 결국 블로그를 통해 돈을 버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직접적으로 블로그에 돈을 써서 버는 것과, 블로그를 홍보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현재는 달라야만 한다.
4. 범주화의 문제
이건 정체성의 문제와도 비슷한데, 내가 이전의 글에서 언급한 ‘나를 블로거라고 불러서 싫었던 경우’에는 그렇게 부르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예전에 내가 <에스콰이어>에 실었던 글 ‘설익은 셰프’ 때문에 트위터에서 좀 웃기는 상황이 벌어졌는데…(후략). 이건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인데, 나는 어딘가 무리에 속하는 것을 싫어한다. 모모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무조사니 뭐니 이야기가 나오고 그런 블로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얼씨구 좋다 집중포화를 퍼붓는 걸 보고 있노라면 내가 내 블로그를 사랑하는 것과 관계없이 ‘블로거’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 이런 예는 실생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정치인이 그 좋은 예다. 우리는 정치인을 씹지만 정치인들이 다 빌어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부정적인 인식의 숲에서 사는 현실이라면 정치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 정치인이요’라고 늘 흔쾌히 자신을 밝힐 수 있을까? 물론 정치인은 이름과 얼굴 알리는 것이 생명이니 부정적인 인식이라도 달가와 할 확률이 높겠지만…
5. 블로그의 운영문제
‘블로그를 부끄럽게 생각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나는 내 블로그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블로깅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운영방법에는 변화를 줄 수 밖에 없다. 사실 어떤 콘텐츠들이 올라오지 않는 이유는 이익보다 시간의 문제다. 물론 이것도 따지고 보면 이익 문제라고 할 수는 있다. 일하는 시간을 쪼개서 블로그를 꾸려 나가다 보면 예전만큼 시간이 드는 포스팅을 할 수 없어진다. 물론 매체에 공급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올릴 수 없게 된 콘텐츠들 또한 있다. 기본적으로 매체에 올린 글은 여기에 다시 올리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는데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유료독자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다. 감사드릴 일이지만 분명히 내 글을 보기 위해 내가 글을 게재하는 매체를 사 보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단 십 원을 내더라도 배려는 해야만 한다. 내가 이 블로그와 매체에 동시에 글을 쓰며 생각하는 모델은 사실, 내가 가장 많이 들여다보는 웹사이트인 ESPN의 ‘Insider’이다. 2003년인가부터 ESPN은 유료 컨텐츠를 만들기 시작해서 연회비 삼십 몇 달러인가를 내면 그 콘텐츠에 접근이 가능하게금 만들고 유료화의 범위를 넓혔다. 그렇다고 해서 공짜 콘텐츠가 아예 없거나 개판이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매체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지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운영방식은 바로 그런 것이다. 매체에는 유료 독자를 위해 최대한 밀도가 높은 콘텐츠를 제공하고, 여기에는 그러한 콘텐츠의 뒷이야기나 거기에서 파생되는 보다 더 편한 읽을 거리 등등을 올린다는 계획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블로그와 찾아주시는 분들을 무시하느냐면, 그건 절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이 블로그에는 블로그만을 위한 콘텐츠들이 있다. 특히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심을 가지는 음식 관련 포스팅을 예로 들자면, 매체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특정 식당에 대한 평가를 잘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글들은 앞으로도 여기에만 올라오게 될 것이다. 일상적인 잡담을 빼놓고 다른 카테고리의 글들은 대부분 쓰고 싶지만 먹고 사느라 시간이 없어 쓸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글들도 정말 쓰고 싶다. 나는 글을 써서 수입을 만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글을 돈벌이의 수단이라는 전제 아래 쓰는 것은 아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잘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그냥 기본적으로 쓰고 싶다는 욕구가 언제나 있다. 그리고 그 욕구가 이 블로그를 굴리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는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 공책에도 쓰고 메모지에도 쓰고 트위터에도 어디에도 쓴다. 그러므로 나는 굳이 블로거라고 불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블로그 자체를 싫어해서는 아니다. 나는, 거듭 강조하지만 내 블로그를 사랑한다. 끝.
# by bluexmas | 2011/10/01 01:45 | Life | 트랙백 | 덧글(6)
비공개 덧글입니다.
오 이 문장 좋아요. 정말이지 저도 수다 떨고싶은 욕심으로 블로깅을 하는데 요즘은 좀 바보같은(-_-;;) 커멘트들때문에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이건 제 블로그가 더이상 듣보잡-_-이 아니라는 증거로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물론 그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커멘트가 반갑고 and/or 거기서 정보를 얻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