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 블랙-판단착오가 생산중단으로, 아쉬운 수작
사실은 ‘생산 중단’이라는 것도 팔아먹기 위한 전략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라면 블랙을 당장 사서 먹을 생각은 안 했을테니까. 워낙 라면을 잘 안 먹는데, 몇 번 들었다놨다 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그 돈이면 다른 재료를 사서 더 나은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이라는데 한 번 맛은 봐야 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에 집 앞 수퍼에서 네 개들이 한 팩을 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속아주자, 라는 생각으로.
라면을 즐겨 먹던 시절에도 신라면을 좋아한 적은 없다. 인기와 상관없이 신라면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바디’가 부족해서 매운맛에 설득력이 없다. 그냥 매운맛만 두드러지게 만드는데 신경을 썼지 깔아야 할 바탕에 무관심한 느낌이다. 서양 음식에서는 많은 음식에 수분을 더할때 닭육수(chicken stock)을 더한다. 이는 추구하는 맛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인 감칠맛, 두터운 느낌 등등을 보완하기 위해서고 음식의 ‘바디’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신라면 블랙은 한마디로 기존 신라면의 국물에 없던 바디를 더했다. 그래서 맛이 훨씬 두텁고 매운맛도 훨씬 더 고급스럽게 다가온다. 이만하면 그 자체만 놓고 보았을때 훌륭한 라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가격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기존의 신라면에 100원, 많이 봐줘서 200원 정도 더하는 수준이었다면 이 라면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고급화 전략도 좋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라면은 라면이다. 라면을 얕본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라면이라는 음식에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자리매김 imprinting 같은게 있다는 의미다. 나는 라면이 현대식품공학의 업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가격에 이만큼, 특히 우리나라 사람의 정서에서 음식 같은 음식의 느낌이 드는 대체품이 없다. 뜨겁고 얼큰하거나 구수한 국물에 면발이 들어 있는데다가 계란 한 개만 넣어도 적당한 포만감을 간단하게 제공한다. 거기에 라면의 맛은 현대과학이 분석한 미각을 통한, 거의 완벽한 시뮬레이션이다. 성분표를 읽어보라, 수많은 재료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건 결국 자연 재료를 통한다면 더 높은 비용을 치러야할 맛을 훨씬 낮은 가격에, 거의 흡사하게 재현하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라면은 음식의 가상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라고 믿고 먹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사람들이 한물 간 분자요리 가지고 떠들어대는데 사실 라면에도 그 분자요리의 기술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라면은 훌륭하다. 그리고 그 훌륭함은 가격이 웬만하면 세 자리 수라는 맥락 안에서 빛이 난다. 신라면 블랙은 그 맥락을 깨는 무리수를 두었고 결국 심리적인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했다. ‘우골보양식사’니 말도 안 되는 카피를 내세운 광고 또한 제대로 말아먹는데 큰 공헌을 했다. 어느 누구도 라면을 보양식으로 먹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먹어보고, 어차피 라면을 자주 먹지 않으니 이 가격이라고 해도 종종 먹겠다고 생각했으나 생산이 중단되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가끔 보통 신라면에 사리곰탕 섞어서 끓여 먹어야 되겠다.
*분자요리 이야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라면 면발에는 변성전분 modified starch가 들어있다. 온도 변화에 따라 면발의 질감이 달라지는 걸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집 수타면에 간수를 넣어 질긴 경우가 많은데 변성전분이라면 그런 부작용 없이 면발이 오래 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누가 시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by bluexmas | 2011/09/02 16:24 | Taste | 트랙백 | 덧글(29)
굳이 블랙으로 만들어 먹을거면 신라면에 사골 우려낸거 섞어주면 땡입니다.
혹은 대체제(신라면+사리곰탕) 로 불릴만한 것들에 대한 소문이 너무 많이 돌았습니다.
결론은 타이밍과 제품 고급화설정의 실패랄까요.
그나저나 저도 아쉬운 마당에 마트가서 한팩 샀으니 이것도 나름 성공한 마케팅…
변성전분이 100%는 아니고 일부 더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 정말 저도 말 꺼내놓고 나니 궁금해지네요^^
그래서 어떤 라면보다도 애착이 없드만요.차라리 잘 되었다 싶어서.
“느끼함”밖에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농심의 대표작은 웬지 ‘너구리’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