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없는 잡담
마감이 끝났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좋아야 되는데 좋지 않으니까 더 나쁘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이웃사촌이 된 친구와 간만에 술을 마시고 자정께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는데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옆집 남자인듯. 그 시간에 어딜 나가는지 모르겠지만 들어오는 나를 뭔가 불법 침입자 보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나도 여기 사는 사람인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고 물었다. 그 시간에 나가는 사람이 이상한가, 아니면 들어가는 사람이 이상한가. 누가 누구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나.
간만에 낮잠으로 모자란 잠을 보충했다. 어렵게 잠들 수 있었다. 저녁에 일어나서 잠시 망설이다가 마실 나가는 기분으로 선유도에 가서 순대국을 먹었다. 집에는 쌀과 계란 두 개, 토마토 한 개가 있었다. 홍대까지 가서 커피를 마셨다. 덕분에 하루하루 산다.
버스 바퀴 옆자리에 앉아 집에 돌아오는데, 옆자리가 비자 아주머니가 안쪽으로 들어가 달라고 했다. 두 정거장 남아서 거절했다.
아침엔 평생 만원 지하철 처음 탄 것 같은 아주머니가 괴로와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용틀임을 시전했다. 오늘은 그렇게 사람이 많은 축에 속하지도 않았다. 좀 괴로왔다. 만원 지하철은 일종의 인간 테트리스적인 공동체다. 상대방을 의식하고 조금씩 도와줘야 다들 적절하게 위치를 지키고 있다가 내릴 사람 내리고 탈 사람 타서 제 시간에 출근할 수 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하고 피부 접촉하고 싶지 않다. 좋아서 가만히 있는 거 아니다.
그 아침 지하철, 이번 달에만 타면 될 것 같다.
좋지만 나쁜 일이다. 어쨌거나 실패니까. 실패는 실패다. 언제나 그렇다. 책임소재를 끝까지 추궁하는 건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함일텐데…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실패는 실패니까.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말만 앞서는 건 너무 싫다.
평상시에 화의 원인이 아닌 과거의 실패가 화나게 만든다면, 그건 내가 현재 너무 예민해졌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없거나 별 의미없는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너무 많이 받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좌절은 무력감에서 비롯된다. 나는 무력감에 가장 무력해진다.
아까 책을 읽는데 “의욕이 없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한다”와 비슷한 구절을 읽었다. 그게, 그렇지. 실패나 좌절이 그 다음 단계의 움직임을 미루거나 회피하는데 핑게나 구실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봐야 자기 손해이기 때문이다. 나의 손해는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손해로 번진다. 마치 산불처럼.
의욕이 너무 많은데 의욕만 있어서 판은 벌려놓지만 늘 말아먹기만 하는 사람도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반응이나 결과보다 그것들의 정확한 이유나 배경이 궁금할 때가 더 많다. 확실하게 이해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어서다. 판단을 유보하는 건 그 자체로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원래 유보라는게 그렇다. 기다림의 일종 또는 변종 아니던가?
# by bluexmas | 2011/06/16 00:47 | Life | 트랙백 | 덧글(6)
세상이 온통 저와는 반대방향으로 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요.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