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부탁하고 싶은 밤
걸었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또 걸었다. 버스를 탔다. 내려 또 걸었다.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졌다.
세 시에 자고 일곱 시 반에 일어나 출근했다. 한 시간 일을 하고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같은 길을 한 시간만에 또 걷고 싶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썩어가는 그릇 가운데 밥통만 닦아 밥을 안쳤다. 쌀이 떨어졌길래 바로 주문과 송금을 하고 그대로 앉아 일을 했다. 30분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배가 고파져 짜증이 났다. 하던 일을 끊기 싫어 방바닥에 굴러 다니던 바나나를 주워먹고 일을 끝냈다. 그대로 샤워를 하고 뛰어나가 홍대에 들러 30분 동안 커피 세 잔을 마시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마감의 전반전이 끝났다.
한 정거장 일찍 내려 강가를 걸어 집에 돌아왔다. 많이 걸었지만 마지막 행선지에서 다시 쌓인 게 있어 조금 더 걸어야만 했다. 등을 돌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소환해서 싸구려나마 위로를 부탁하고 싶은 밤이 있다. 궁색한 변명을 덧붙여야 한다. 형체는 있지만 실체가 없는, 마음은 있지만 감정이 없는 존재들을 너무 많이 만나 지쳤노라고 말하면 먹힐까. 앙상하게 남은 뼈마저도 삭아가는 손으로 꽤 많이 자란 머리칼 한올한올을 훑어가며 아직 두피까지는 이르지 않은 회한을 좀 털어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밤이 있다.
오늘이 그런 밤이었노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 by bluexmas | 2011/06/11 01:00 | Life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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