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팁 굴욕 3종세트의 날

첫 번째 윙팁은 도산 공원에서 보았다. 요즘 유행하는 마사이족 신발의 밑창에 윙팁처럼 생긴 걸 덮어 씌워놓은 꼬라지였다. 먹던 김밥을 떨어뜨릴뻔 했다. 윙팁이 저렇게까지 망가지다니. 남자 구두의 스타일 가운데 클래식인 윙팁도 사실 잘 신기가 쉽지는 않다. 근데 이건 따지고 보면 윙팁만의 문제도 아니다. 언젠가 유행하던 삐에로 구두 같은 꼬라지는 아닐지라도, 남자 구두의 코도 어느 정도는 뾰족하고 또 날렵해야 한다. 기능을 좇으면 바보되는 게 정장구두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자만큼은 아니지만, 남자로서 감내할까 말까 갈등하게 되는 정도의 불편함은 있어야 한다. 한때 무슨 코스모폴리탄스러운 삶을 사는 커리어맨처럼 정장을 입는 직장생활을 했는데(이 초라한 블로그에 그때의 구차한 기록도 다 남아있다지?;;), 눈먼 돈이나 가격표 때문에 샀던, 소위 말하는 명품 브랜드의 날렵한 구두는 내 못 생긴 발에는 정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불편했다. 물론 여자만큼은 아니겠지만 남자도 좀 멋있어 보이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럭저럭 비싼 윙팁 또한 한 켤레 있었는데, 그건 편안함을 지향하는 것이어서 볼품없었다. 결국 잘 신지 않다가 어디론가로 떠나 보내야만 했다.

또 다른 굴욕 2종은 지하철에서 보았던 것 같다. 캐주얼한 신발에 뭔가 윙팁의 껍데기를 씌우려다가 ㅈㅁ한 느낌이었다. 그런 굴욕의 윙팁이 많은데 그냥 오늘만 눈에 더 잘 뜨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 가끔 여자용으로 귀엽게 변화를 준 윙팁들은 그렇게 꼴사납지 않았건만, 오늘 본 것들은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무슨 패셔니스타냐면 그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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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 내가 여기에서 뭘 하고 있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먹고 싶은 걸 못 먹고, 보고 싶은 영화를 못 보며 읽고 싶은 책을 못 읽는 뭐 그런 상황들 다 괜찮다. 돈이 없어 못해도 괜찮고, 시간이 없어서 못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하고 싶은 생각을 못할 때 나는 의욕을 잃는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닌데 다른 온갖 생각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서 정작 하고 싶은 생각을 못할때 슬퍼진다. 원하는 게 돈과 시간이 아니더라도 손에 넣을 수 없다는데서 샘솟는 좌절 같은 게 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지만,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위안을 얻을 때도 있다. 이 위안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자가발전으로 얻는 것이다. 딱히 타인의 도움이나 뭐 이런 것들이, 적어도 이만큼 살아온 이 시점에서는, 필요하지 않다. 그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무력함을 느낀다. 현실의 내가 힘들면 내 생각 속에 존재하는 나라도 그보다는 낫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화해나 용서 같은 것들도 그럭저럭 할 줄 알고, 쓸데없이 예민하게 굴지도 않는. 그래서 실패도 좀 덜 하는. 그런 존재를 만들어 위안을 삼으려면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게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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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은 장을 보는 날이다. 차가 없으므로 어떤 식으로 나눠서 장을 볼 것인가 궁리를 좀 했다. 단백질 종류는 큰 마트에서, 야채나 과일은 필요한 만큼 동네 마트에서 사는 방식이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 문득 봄도 거의 다 지났는데 두릅은커녕 마늘종도 한 번 안 해먹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작년에는 산딸기를 사다가 타르트도 해 먹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심지어는 완두콩도 안 사다 먹었다. 시간이 나면 재래시장에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좌절했다. 마트에서 죽순을 집었는데 짐이 많아지는 것은 물론,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벗기고 다듬을 엄두가 안 나서 내려놓았다. 겉으로는 ‘아 비닐에 싼 죽순 사기 싫다’라고 정당화를 했다. 작년에 담양에서도 제대로 된 죽순을 못 사왔는데 올해는 그것도 못 먹을 것 같다. 내친 김에 브로컬리와 새송이 버섯도 내려놓았다. 짐은 양 손에 딱 적당하게 들을 수 정도로 나왔다. 버스를 타려고 길을 건넜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택시를 잡았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집 앞까지 택시를 탄 적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저씨는 별 군말이 없었다. 200원 더 드리고 내렸다. 아,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딸기를 샀다. 꼭 아이스크림을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이까지 꽉 깨물면서 집어든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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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목련은, 봄 따위는 기억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 앞에서 봄을 기억하며 사진을 찍은 내가 다 민망했다. 매년 꼭 이런 식이다. 인간관계보다 더 나쁘다.

 by bluexmas | 2011/05/19 00:05 | Life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by cleo at 2011/05/19 09:10 

윙팁구두가 뭐지.. 했드니만, 내가 좋아하는 남자구두 바로 그것이었군요~:D내 평생 남자구두 보고 반했던 건 처음이었습니다.

(폴 스미스 매장에서 발견했는데.. 신발 만드는 브랜드가 아니니 더 불편하겠죠-.-)

내 남자에게 윙팁구두 사주고 싶었지만, 워낙에 편한 신발만 찾는지라. ;;

대신.

여자용으로 귀엽게 변화를 준 윙팁구두 제가 한 켤레 사서 잘 신고다닙니다.

그리 꼴사납지는 않아요 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5/21 00:56

네 맞아요. 여자용 차라리 귀여워요. 클레오님이라면야 뭐…
 Commented by SF_GIRL at 2011/05/19 10:30 

요거 보셨나요. 윙팁의 유행이 돌아왔다 두두두둥 하는 기사인데 저는 남자 패션쪽은 잘 몰라서 작년에 나온 이 기사 보고 유행인줄 알았답니다.

그러고보니까 전의 룸메이트 아가씨 (키가 엄청 크고 스타일이 좋았는데)가 이런 모양인데 옆부분은 뻥 뚫린 신기한 디자인의 구두를 신었는데 예뻤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5/21 00:57

클래식인데 재조명도 받고 그러겠죠 뭐; 기사에 나오는 건 엄청 에쁘네요.
 Commented at 2011/05/19 15:53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