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레스쁘아-음식과 의지
비스트로는 캐주얼하고 저렴한 레스토랑이다. 동네 식당 정도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메뉴가 없는 경우도 있다. 재료비를 맞추기 위해 정육보다 오래 조리해야할 필요가 있는 부위를 사용한다. 조림(braising)이나 스튜류의 음식이 많은 이유다. 어딘가 ‘프렌치는 오래 조리하기 때문에 이탈리안보다 비싸다’와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도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렇게 따지만 100시간 끓이는 데미글라스나 일본식 카레가 가장 비싼 음식이어야 한다. 캐비어나 송로버섯은 조리할 필요도 없는데, 음식 가운데 가장 비싸다.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에도 오트 퀴진에 질려버린 젊은 셰프들이 비스트로 문화를 수립하는 이야기가 나온다(그런 형식의 레스토랑인 비스트로가 왜 우리나라에서는 파인 다이닝이어야 하는지 누군가 물어본다면…).
두 사람이 레스쁘아(L’espoir)에서 Gourmand(75,000+10%)로 저녁을 먹었다(두 사람이 갔으므로 음식에 대한 기억이 평소보다 분명하지 않음을 미리 밝혀둔다. 역시 혼자 먹으러 가야한다…). 별로 아는 게 없으니 추천을 부탁해서 작은 병으로 와인을 시켰다. 당연히 혼자서 한 병도 마실 수 있지만, 반드시 적당하게만 마셔야만 하는 상황에서 반 병짜리를 많이 갖춰 놓는 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밑반찬 깔리듯 올리브 타페나드와 푸아그라 파테(?), 올리브유 등등이 나왔는데, 특히 타페나드가 인상적이었다. 올리브와 안초비의 서로 다른 짠맛이 각각 잘 살아 있어서, 오늘 나올 음식이 어떨지 살짝 예고편을 흘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빵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고, 직접 굽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공간 부족이라는 이유를 들었는데, 수긍할 수 있었다. 굽는다고 하면야 누가 말리겠느냐만, 비스트로에서 직접 빵까지 구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음식의 격에 맞는 빵을 납품받을만한 곳이 별로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빵을 데우지 않고 웨이터가 쟁반에서 옮겨 주는데, 어떠한 의도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레스쁘아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프렌치 어니언 스프. 농축된 양파+셰리(?)의 단맛 밑으로 그만큼 두드러지는 짠맛이 깔려 있다. 맛있게 먹었는데 먹을 때마다 프렌치 어니언 스프의 원형 그 자체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닌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스프 자체도 단맛이 너무 강하다고 느낄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쳐도, 빵은 스프에 완전히 잠겨 곤죽이 되어 버리고 치즈는 곧 질겨진다. 클래식이라는 자체로는 의미가 있지만 청키면가에 대한 글에서 언급했듯 그 원형 자체가…(하략)
시저 샐러드. 치즈며 안초비가 마치 머리 두 개 달린 용처럼 덤벼대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지만, 그보다 밑에 깔린 샐러드와 함께 선사하는 진득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사실은 나도 대체 시저 샐러드가 어디에서 왔는지 관심이 없었는데, 글을 쓰며 찾아보니 미국에서, 그것도 멕시코계인 시저 뭐시기라는 사람이 처음 만들었다고(?!).
다음은 조린 달팽이와 오리 가슴살. 달팽이는 크로아상 그리고 소스와 더불어 진한 무엇인가가 스르륵 지나간다는 느낌-군데군데 씹히는 달팽이살의 식감과 함께-이었고, 오리 가슴살은 버섯의 흙맛(?, 영어로 치자면 earthiness)과의 조화가 기억에 남았다. 한식으로 먹는 거야 그렇다 쳐도, 양식당에서 내가 먹은 오리치고 제대로 조리한 것이 없었다. 오리는 닭이랑 완전히 다른 고기인데다가 지방이 많으니까 뜨겁게 달군 팬에 껍질 면부터 지져서 지방을 빼고 그 껍질을 바삭바삭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기본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걸 먹은 기억이 없다. 레스쁘아의 오리는 그렇게 조리되어 있었는데,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미디엄 레어?-것보다 조금 더 익은 상태라 처음에는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덜 익었다고 이야기할까봐 일부러 그렇게 구운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안심스테이크. 농담이 아니라 정말 드라이에이징 전문이라는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의 것보다 나았다. 정말 잘 구웠다(물론 왜 꼭 스테이크?라고 물어본다면…?).
캐술레는 맛있었는데, 고기도 전반적으로 형태가 살아있을 정도로 익혔지만 콩도 ‘알 덴테’여서, 이것이 의도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디저트는 음식에 비해보면 실망스러웠다. 크림 브륄레는 커스터드에서 끈적거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무난했는데, 마스카르포네를 넣었다는 치즈케이크는 그랬다고 믿기 어려운 식감이었다. 지난번에 ‘파티세리 미쇼’에 대한 글에서 레스쁘아를 언급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디저트가 조금 더 나았더라면 훌륭한 음식에 더 훌륭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어쨌든, 레스쁘아의 음식은 훌륭했다. 긴 말 다 필요 없고, 일종의 의지 같은 걸 느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추구해야하는 이상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듯 보이고, 그게 음식에서 드러난다. 만드는 사람은 최선이라고 철썩 같이 믿지만, 돈을 내고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슬프게도 아닌 경우가 있다. 아니, 사실은 많다. 먹는 나와 만드는 셰프가 레스토랑 음식에서 기대하는 수준이 일치하는 경우가 드문데, 레스쁘아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셰프가 기대하는 수준이 더 높을지도 모를 일이고. 좌우지간, 이런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내가 무슨 개인적인 감정이라도 지닌 것처럼 젊은 셰프들을 향해 ‘설익은 셰프’니 뭐니 하는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빌어서 밝히자면 나는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전혀 관심이 없다. 음식이 별로였고 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며 생각해보니 그런 결론을 얻었을 뿐이다. 레스쁘아 같은 레스토랑이 많으면 먹고 적어도 짜증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고, 원래 그래야만 한다.
# by bluexmas | 2011/05/17 10:19 | Taste | 트랙백 | 덧글(6)
다만 오픈 주방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무지하게 갈궈대서 ㅠㅠ 편하게 밥 먹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요리가 나오고 나서부터야 그래도 괜찮았지만 식전빵만 덜렁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군대식으로 갈굼을 당하는 걸 듣는다는 건… 정말 이상한 웰컴 디쉬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