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기념 잡담

어제는 “취재원”에게 기사가 실린 책을 보내주려고 우체국에 들렀는데, 다이어리 또는 스케치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히 챙겨서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디엔가 흘렸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럴만한 곳은 을지로의 명함 가게 뿐이었다. 부랴부랴 번호를 찾아 전화했더니, 그런 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이후부터 계속 그 생각만 했다.

저장 또는 기록 매체를 잃어버리면 괴롭다. 저런 메모장같은 아날로그 매체나, 심지어는 하드 드라이브 같은 디지탈 매체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그건 사실 중요한 기록 그 자체를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을 정리나 저장, 또는 물질화를 하기 위해서 이런 매체를 쓰는데, 어쨌거나 궁극적으로는 매체를 위한 매체를 머릿속에 굴려야만 한다. 쓸데없이 문장이 꼬이는데, 만약 각각 다른 용도로 다이어리를 쓰면 그 각각에 무슨 내용을 기록하는지 또 머리로 기억하는 상황이랄까? 아니면 목록을 위한 목록?-_- 의존하지만 완전히 의존할 수 없어서 벌어지는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대체 어떤 정보가 들어있는지조차 모르는, 아주 오래된 하드 드라이브를 밀어놓고 며칠 동안 괴로워하기도 했다(언젠가 여기에 쓴 것도 같은 기억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속속들이 다 기억해서, ‘아 전부 쓸데없는 것들이었으니 없어도 상관없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면 괜찮은데 몇몇이 기억나지 않고, 그것들이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끙끙 앓게 되는 것이다. 속 시원하게 보내버리지 못하고.

어쨌든, 집에 돌아오니 책상 독서대 위에 다이어리가 멀쩡하게 계셨다. 내가 그렇지 뭐.

딱히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달려야만 했다. 여의도까지 갔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굳이 보행로를 타는 자전거와 눈이 없는 사람들, 고삐풀린 애완동물을 부지런히 피해야만 했다. 순복음교회를 지나 찌아찌아족 전통 안무 공연을 하는 무대까지 달린 뒤 돌아 정해진 거리를 채우고 그 뒤부터는 걸었다. 딱 돌아서니 맞바람이 거세지는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돌아서자마자 남되는 느낌이랄까? 어제까지는 OO하는 사이였는데.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해봤는데, 지난 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가 많이 무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그저 아주 평범한 어린이날처럼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결국 절대 만날 수 없는/만나서는 안되는 사람이 늘어만 가는 일종의 선형적인 과정이다. 세상만사 모두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 같은데, 결과로 놓고 본다면 인간관계의 엔트로피는 결국 감소하는 것 아닌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자꾸만 적어지니까.

달렸던 길로 쭉 걸어 집까지 가려다가, 지루해져 양화대교 위로 올라와 버스를 탔다. 노선도를 보니 뭘 타도 어쨌든 집 근처에 간다는 사실에 기뻤다. 나는 아주 좋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버스에 사람이 많아서 앞문에 구겨진 채로 서 있었는데, 앞의 아저씨가 배낭에 꽂아놓은 등산용 지팡이가 계속해서 거슬렸다. 들고 있기도 뭐하고, 배낭에 넣어도 뭐한 듯 싶었다. 그렇게, 길고 곧으며 딱딱하기까지 해서 접을 수 없는 것들은 종종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사람의 성격이 그렇다면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모두의 적이 된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심지어 본인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염창역에서 내려오는데 아저씨가 트럭을 대놓고 찰토마토를 팔고 있었다. 본 순간 살까 망설였지만 그냥 지나쳤다. 배가 너무 고파서, 집에 해놓은 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순대국집에서 저녁을 먹었다.처음 먹은 뒤로는 배고플 때마다 생각이 났다. 밥값을 내면서 ‘2주 전에 이 동네 이사왔는데 정말 이사오기 잘 했네요 순대국이 너무 맛있어서’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유를 사러 수퍼에 들렀는데, 멍든 딸기를 싸게 팔길래 그것도 집어왔다. 어제 비디오로 본 디저트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지만, 시간이 없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글 쓸 시간에 만들면 다 만든다.

 by bluexmas | 2011/05/05 23:59 | Life | 트랙백 | 덧글(8)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5/06 00:22 

OO=?

 Commented by 닥슈나이더 at 2011/05/06 08:29 

저도 어제 여의도….. 물론.. 출근…ㅠㅠ;;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5/07 00:05

고생 많으셨네요 ㅠㅠ

 Commented by young at 2011/05/06 19:56 

회사 임원 분의 모토가 생각 납니다. 회사는 보고로 시작해서 보고로 끝난다. 보고를 위한 보고가 참 낭비같으면서도 안 그런 곳이 어디있을까 자문 해보곤 해요. 그나저나 생각납니다를 한 다섯번 샹각으로 썼어요 지금 도 한번 샹각으로 썼습니다. 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5/07 00:09

샹각이라니 왠지 샤방샤방합니다… 앞으로는 샹각이라고 쓰셔도 생각이라고 알겠습니다.

참, 운동화에 대해서 잘 아시니 하나만 여쭤볼께요. http://bit.ly/jMwhsKv 혹시 이 신발 아시는지요?

 Commented at 2011/05/07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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