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y, directer

공장장과의 일문일답

문: 결국 부업도 큰 그림을 보면 글쓰기의 연장인 셈인데,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타자쳐서 피곤한 건 뭘로 풀어버리시는지요?

답: 네, 술은 술로 풀고 알 배긴 건 운동으로 풀고… 글쓰기는 글쓰기로 풉니다. 자기 전에 블로그에 올릴 잡담 쓰는 걸로 풀어요.

문: 그렇게 글쓰기 좋아하는데, 돈은 좀 버세요?

답: 왜 그런 슬픈 건 물어보시고ㅠㅠ… 냉동실에 쟁여둔 보드카나 마실래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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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간만에 한남동에 들러 L과 실컷 뒷다마를 깐 뒤, 405번을 타고 남대문시장 쪽으로 향했다. 하교 시간인지 교복입은 학생들이 꽤 많았는데, 금방 앉은 옆자리에 작은 체구의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아이와 소년의 경계선에서 아이 쪽으로 한발짝 더 디디고 있는, 교복도 어색한 아이였다. 그런 분위기가 묘하게도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데가 있어서 남산을 넘는 동안 아이에게 눈길을 주었는데, 그는 열심히 단어공부를 하느라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8절 갱지에 연필인지 샤프로, 적어도 스무번 정도는 같은 단어를 썼다. 처음 눈에 들어온 단어는 ‘directer’였다. 내가 잘못봤나, 싶어 다시 봤지만 역시 directer였다. 보니까 가방에도 그렇게 단어를 쓴 종이가 있고 challenging이나 observe같은 단어들도 있던 것 같은데, 모두 철자가 맞았고 오직 directer만 틀려 있었다. 뭐라고 얘기라도 해줄까, 잠깐 오지랖 떨 생각을 했으나, 삼촌뻘인데다가 인상도 험악하고 머리마저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길어 이상한 형상인 내가 말을 붙이면 겁을 먹는 건 그렇다쳐도 단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학생은 남산 도서관 근처에서 내렸다.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몇몇 같이 내렸지만, 학생의 얼굴이나 분위기에서 짐작한 것처럼 아무도 그와 같이 길을 건너지 않았다. 그는 혼자 걸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바깥에 나다니면 대중교통에서 학생들 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만, 공부하는 학생을 본 건 기억하는 한 처음이다. 나는 사실 그 학생을 굉장히 짠한 마음으로 보았는데, 우습게도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말하기 왠지 민망하지만, 나도 초등학교 때부터 버스 안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그때의 나는 뭐랄까, ‘아 나는 존나 돼지라고 놀림받고 체육시간에도 병신취급 받으니까 공부라도 잘 해야 아무도 무시하지 않겠구나!’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했으나 1등은 거의 못했고, 그러나 저러나 돼지나 병신 취급은 마찬가지로 받았다. 아니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성적 잘 나온다고 더 돼지나 병신 취급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옆자리의 그 학생은 이름도 그렇고 얼굴도 곱상하니 문학청년의 분위기가 풍겼는데,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단어 공부하는 분위기나 이모저모로 요즘 아이들 느낌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순수하게 공부가 좋아서 하는 거지 나처럼 뭔가 다른 부분에서 결핍된 걸 메우기 위해서 버스 안에서까지 지독하게 단어를 외우는 상황은 아니기를 빌었다. 집이 남산이라면 허벌나게 잘 살 확률이 있으므로 뭐 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하필 오전에 그와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난 터라, 오후에 버스에서 그런 학생을 본 게 왠지 우연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실시간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우울해질 수 있다고 했고, 나는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거의 대꾸를 할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런 순간들이 무시로 찾아온다. 기분이 좋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울컥, 기분이 나빠질 때가 있다. 그건 너무나도 뜬금없이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이다. 30년 이상 된 것부터 채 5년도 안 된 것까지, 기억들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그래도 최근 것들은 조금 낫다. 인과관계를 따질 수 있거나, 그래서 그러한 기억에 등장하는 상대역들을 마음껏 미워하거나 때로는 용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기억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대부분의 상대역들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고, 아직도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혼자 삭힐 수 없는 것들은 전혀 상관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오로지 나만이 연결지을 수 있는 매개체에 의해 불거져 나온다. 물론 매개체고 뭐고 상관없이 불거져 나오는 경우도 많다. Skeleton in the closet이라고 했던가, 나 또한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너무나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런 기억들의 존재를 달가와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사건사고의 불씨가 되어도, 나는 차근차근 설명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저 말만 더듬고 있게 된다.

답을 내부에서만 찾는 건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아 나는 존나 돼지라고 놀림받고 체육시간에도 병신취급 받으니까 공부라도 잘 해야 아무도 무시하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버스 뒷자리에 앉아서 단어나 외우고 문제집이나 푸는 건 사실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또 다른 회피다. 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 커 버린 나는 늘 잘못을 저지르고 살더라도, 그때의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자꾸만 숲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그, 아니 나를 찾아서 말해줘야만 한다. 지금의 나는 더럽고 썩은 존재이기는 해도, 그때의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노라고. 괜찮다고. 그래야 지금의 나도 버스 뒷자리에 앉아 단어나 외우고, 문제나 푸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은 사실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완전히 풀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시도라도 해 봐야 한다. 아직도 남은 날들이 너무나도 많고, 계속해서 기시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나는 그렇다쳐도, 다른 사람까지 기시감의 늪에 끌고 들어가고 싶지 않다.

 by bluexmas | 2011/03/20 02:16 | Life | 트랙백 | 덧글(8)

 Commented at 2011/03/20 02:2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3/21 01:08

그럴까요…

 Commented by 파고듦 at 2011/03/20 15:43 

소년이라..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3/21 01:09

…………..

 Commented by meenee at 2011/03/24 01:46 

405번 노선을 좋아했는데.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3/25 00:29

요즘은 타실 일 없으세요? 정말 좋은 노선이에요. 그 길에 저도 나름 추억이 좀 있어서 지나다닐때마다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요즘은 덤덤하지만.

 Commented at 2011/03/25 07:4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3/26 22:33

아이고 그러시군요… 가을쯤에도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