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조악함, 패션 파이브 케이크
어제, 아주 오랫동안 결심했던 일을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그 일은… 패션 파이브의 케이크를 먹어보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케이크나 디저트를 먹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나은 곳도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기 때문에, 초점은 대체 어디까지 좋거나 나쁜가를 파악하는 데 있었다. 진열장에 있는 걸 다 먹어볼 필요도 없다. 두 개 정도만 먹어보면 되고, 그 가운데 하나는 초콜렛이면 된다. 그래서 딸기 얼 그레이와 오페라, 두 조각의 케이크를 샀다.
잘 모르고 있었는데, 패션 파이브의 시스템은 웃겼다. 1층에서 먹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2층에서 먹으려고 해도 손님이 그 긴 동선을 타고 케이크를 날라야 한다. 덤 웨이터도 없고, 직원도 없고, 심지어 무슨 뚜껑 같은 것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제빵제과회사의 본부 격인 매장이 이 정도를 생각 못한다는 건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모든 걸 얘기하기는 너무 귀찮으니까 카페 공간이니 뭐 이런 것들은 말고, 그냥 케이크 이야기만 하자. 한 마디로 딱 <무궁화>의 수준이었다(이제부터 내 블로그에서 모든 의도적으로 성의없게 만든 음식은 ‘무궁화 퀄리티’로 통한다). 딸기 얼 그레이라는 케이크는 한 입 먹으니 딱 올라오는 맛이 바로 그 추억의 딸기맛, 그러니까 딸기우유 딸기맛이었다. 우리가 딸기맛이라고 학습받아와서 그렇게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딸기맛이 아닌 바로 그 맛. 바로 지난 주에 카카오봄의 딸기 트러플인가를 먹었는데 거기에서 느낀 딸기맛보다 훨씬 싸구려 느낌이 심했다. 그리고 그 뒤에 유쾌하지 않은 씁쓸함이 올라오는데 그게 바로 얼 그레이맛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넣은 맛 같았다.
그 옆의 오페라는 그야말로 수천겹의 케이크가 쌓여 있었는데, 보통 이 정도 가격(둘 다 육천원이었다)의 케이크라면 가지고 있을 그 반짝반짝한 글라사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흐리멍텅해 보였고 맛도 딱 그랬다. 어느 하나 두드러지지 assertive하지 않은,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맛. 두 케이크를 몇 입 먹고 나자 시큼함이 입안 가득 남는 게, 재료의 수준 및 상태가 어느 정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이 둘 다 반을 못 먹고 남겼다.
오페라 위에 얹은 금박이 보이는가? 패션 파이브를 비롯, 이런 종류의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바로 이 금박과 같은 표현으로 압축된다. 맛에는 아무 상관없으나 있어 보이기 위해 더하는, 유사 고급 이미지다. 물론 우리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미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말할 필요는 없지만, 음식이 맛보다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건 난센스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음식들이 눈요깃거리로서 최상급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느냐면 또 그런 것도 절대 아니다. 조각당 육천원 정도의, 동급 최고 수준의 가격에서 이들이 제공하는 건 3,500원 정도의 장인정신에 바탕한 완성도일 뿐이다.
대형 프랜차이즈에도 나름의 미덕이 있다. 자본이나 정보력을 비롯한 인프라 스트럭쳐는 소규모 자영업자가 갖출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적극 활용해서 눈이면 눈, 입이면 입, 그것도 아니면 지갑까지, 셋 가운데 하나라도 좀 만족을 시켜줘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전부터 쭉 들르면서 먹어보았던 패션 파이브의 빵이며 과자 류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진짜 또는 원형이 가지고 있는 맛이며 완성도의 60% 정도에 달하는 수준에 마케팅을 비롯한 이미지를 입혀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말은 참 쉽게 쓰면 안되는데, 요즘은 쉽게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바로 이러한 케이크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가짜가 열 개 있으면 진짜도 한 두 개는 있어야 되는데, 둘러보면 0.5개 정도 있을까말까 하다. 시간 아까워서 그만 쓰겠다(이 글을 쓰는데 들인 시간: 10분).
# by bluexmas | 2011/03/17 14:24 | Taste | 트랙백 | 핑백(1) | 덧글(32)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1/12/31 17:45
… 올 한해 이글루스에서 994번째로 게시물을 가장 많이 작성하셨네요. 1위: 잡담(284회) | 생일 2위: 디저트(53회) | <무궁화>의 조악함, 패션 파이브 케이크 3위: 홈베이킹(35회) | 완벽한 초콜릿칩 쿠키를 찾아서 4위: 파스타(24회) | 짜장면을 닮은 구태의연 파스타 5위 … more
말만 들었지 가보지는 못했었는데 말이죠..
비공개 덧글입니다.
남은 케익의 상태가 슬퍼지네요, 오죽하면 저렇게 남았을까, 달걀아 미안해 설탕아 미안해 밀가루야 미안해 버터야 혹시 들어갔으면 너도 미안해- 해야할 기분.
겉보기엔 참 예쁜데 말이죠.. 저도 여기 칭찬을 하도 많이 들어서 궁금했는데; 감사합니다..
요새 빵집 참 많은데 손 가는 곳은 별로 없네요. 에릭 케제르도 처음에 몇 번 신나서 갔는데 또 금새 시들하구요. 저는 도쿄 팡야나 오월의 종에 가보고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_@~
생각해보니 저도 커피랑 마카롱 한 두개 정도 밖에 못 먹어 봤네요;;;;;
굳이 거기까지 찾아가서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봐요…. 비싸다 못해 폭리 레벨이라 -_;;;;;;;;
(그때 덧글 달고 싶었는데 덧글이 안 달리는 글이었나봐요;;)
오늘 ‘무궁화 퀄리티’ 보고 진짜 바닥을 구르며 웃고갑니다….이게 웃을일이 아닌 것 같은데;
비공개 덧글입니다.
저 오페라는 ‘오페라’라는 세글자를 읽기 전엔 오페라인지도 몰랐네요; 으아…
그래도 외관은 참으로 멋들어지던데 거기 투자할 돈으로 재료에나 더 돈 쓰지 싶…허허허
그래도 케익보단 롤케익이 맛나더라구요
직접 만들어 먹는게 가격도 훨씬 싸고 심지어는 패션파이브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제가 패션파이브 처음 갔을 때의 느낌은 일본 고급 베이커리의 짝퉁같은 느낌이 심하게 들었네요.
모양 자체도 섬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육천원이라니…….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