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더 반 스테이크 하우스-단순함의 미덕?
스테이크 하우스의 정수란 무엇일까? <No Reservation>의 한 일화가 기억난다. 이제는 음식을 만들어본 또는 만들었던 적이 있다고 어렴풋이 전해 내려오는 연예인 토니 부어댕이 음식 관련 작가와 어느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요점은 스테이크하우스의 마초(macho)스러움이다. 정장을 차려입고 중절모를 쓴 남자들이 위스키를 마시며 시가를 피워댄다. 그리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실로 ‘입맛 떨어지는(unappetizing)’ 크기의 스테이크를 먹는다. 섬세함? 그런 건 모른다. 그저 고온에 고기를 굽고 적당히 조리한 야채를 곁들여 낼 뿐이다. 요는 스테이크 하우스라는 식당의 본질이 그렇게 섬세(sophisticated)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스테이크의 가격도 비싸고 전통적으로 고기 먹는 방식에 비해 사람들에게 덜 환영받을 확률이 높은 스테이크 하우스가 그런 식의 컨셉을 도입할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도산 공원 근처의 ’이사벨 더 버처‘가 흉내를 내보려고 시도한 것 같았으나 한마디로 청담동 분위기가 너무 많이 나서 별로였다.
텐 꼬르소 꼬모 바로 건너편의 스테이크 하우스 ‘더 반(The Barn)’ 또한 그런 컨셉트의 스테이크 하우스는 아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수수한 인테리어에 조금 놀랐다. 위에서 언급한 만큼의 마초 냄새 같은 건 아니더라도, 적당한 가격대의 지방 프랜차이즈 스테이크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났다고나 할까?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는 프랜차이즈는 아웃백 따위가 아니다(미국에서도 아웃백 같은 스테이크 하우스는 구리다. 또 이렇게 써 놓으면 ‘니 입은 고급이라 아웃백 같은 건 음식 취급 안 하냐’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텐데… 지금이 1999년도 아닌데 “팸레”를 먹는다는 건 식도락적인 자살행위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그 돈이면 깨끗하게 하는 중국집에 가서 요리 몇 접시 시켜 먹는 편이 낫다. 각 예산대에 맞는 음식들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싼 가격에 스테이크 찾아봐야 구린 고기 구리게 조리한 게 전분데 그걸 꼭 먹어야 하느냐는 말을 하고 싶다). 작게는 도시, 크게는 주에 걸쳐 서넛에서 많게는 대여섯 정도의 매장을 가지고 운영하는 지방 프랜차이즈 레스토랑들이 있다. 그도 아니면 살던 동네에 있던 Capital Grille처럼 미국 전 지역에 걸쳐 서너 군데의 레스토랑을 가진 프랜차이즈도 있다. 이러한 레스토랑들은 그래도 적절한 가격대에서 적절히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음식을 낸다. 우리나라에 ‘텍사스 소떼’ 운운하는 농담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텍사스에서 먹었던 동네 프랜차이즈의 스테이크는 가격에 비해 훌륭한 수준이었다. 사설이 길었는데, ‘더 반’에서는 꼭 그런 분위기가 났다(‘더 반’과 츠지원 등등과의 관계는 쓸 말 없으신 파워 블로거님들이 꼭 쓰실테니 그런 곳을 찾아서 보시면 된다. 나는 쓸 말 많으니 그냥 통과).
점심에는 이런저런 세트 메뉴가 있는데, 스테이크를 먹는다고 가정할 때 최고로 쓸 수 있는 돈은 45,000원이다(부가세 별도). 스테이크 하우스의 정체성에 맞지 않게 리조토와 같은 것도 있고, 또한 햄버거도 있어 구색은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옆자리에 앉은 선남선녀가 시킨 리조토를 보니 막말로 싹수가 있어보여 살짝 기대가 되었다.
립아이 스테이크로 런치 세트를 주문하고 곧 빵이 나왔는데, 한눈에 납품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바게트야 뭐 그렇다 쳐도 까만 올리브가 든 치아바타는 은근히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억하지 못하는 맛인데 대체 어디에서 만든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감자와 파 수프는 겨울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나도 심심할 때면 한 번씩 만들어 보는데, 물론 아마추어의 솜씨를 프로의 그것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은근히 잘 만들기가 쉽지 않다. 오래 끓이면 만사 해결될 것 같아서 푹 끓이면 감자향도 파향도 모서리가 너무 닳아버려 달착지근한 풀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수프는 두 재료의 향 모두가 잘 살아서 맛의 바탕(감자)과 정점(파)을 뭉그러짐 없이 잘 이루고 있었다. 보통 감자 들어가는 수프에 산 한 두 방울 정도(타바스코!) 뿌려주면 균형이 모두의 기대보다 훨씬 더 잘 맞는데, 그런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우리나라에서 먹어보았던 수프들 가운데에서는 균형이 가장 잘 맞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먹고 살짝 놀랐다.
그런 놀라움은 시저 샐러드에서 한층 더 증폭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병신 된 음식을 꼽으라면 피자나 스파게티(또는 파스타)가 제 일선에 바로 자리 잡을 텐데, 사실 시저샐러드도 만만치 않다. 일단 그 드레싱이 말도 안 되고, 그 말도 안 되는 드레싱을 파스타 병신 만들 듯 질척하게 뿌려내서 더 말도 안 된다. 샐러드에도 드레싱을 떡칠할 필요가 없으며, 시저샐러드의 드레싱은 당연히 꼬릿해야 한다. 주재료가 앤초비와 파마지아노 치즈라면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 아닌가? 정말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샐러드라고 하기엔 사리가 나올 정도로 절제해서 버무린 시저샐러드였다. 그리고 또한 꼬릿했다.
그리고 스테이크. 대한민국 최고의 고기오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횡성 <우가>의 사장님 말처럼 웰던으로 시키는 호기를 부려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추천하는 미디엄 레어로 주문을 했는데, 정작 나온 정도는 미디엄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셰프님이 나와서 다시 해줬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보셨는데, 내가 원하는 게 오히려 이것이었으므로 다시 청하지 않았다. 비록 수프와 샐러드였지만 먹어보니 어떻게 음식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인지 대강 감을 잡았으므로 병신처럼 아는 체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여담이지만, 난 우리나라 레스토랑에서 셰프들이 나와서 너무 손님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잘 하는 셰프라면 권위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음식에는 권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나는 요즘 유행인 열린 주방도 싫고, 셰프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자주 나오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셰프의 자리는 언제나 주방일 수 있는 분위기를 먹는 사람들이 만들어줘야 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테이크의 차림은 단촐했다. 으깬 감자도 버섯도 비교적 잘 조리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으깬 감자의 경우 아주 살짝 더 물기가 있어 소스의 역할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한 촉촉함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아무래도 좀 씹히거나 ‘볼륨감’이 있는 으깬 감자를 좋아하는데, 사실 미국에서 먹는 으깬 감자는 거의 수프에 가까울 정도로 물기가 많다).
미국산 프라임급(근데 사실 진짜 좋은 프라임급, 그러니까 미국 고기 전체의 3% 정도에 해당하는 것들은 미국 레스토랑으로 넘어가기도 바쁘다고 하던데…?)을 숙성(어떤 방식인지는 잘 기억 안 난다. 이건 또 다른 파워 블로거님들이 확인해주시리라)했다고 하는데,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맛의 곡선이 급강하하는 느낌이었다. 처음은 훌륭하지만 그 맛의 여운이 곧 사라지고, 섬세한 느낌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그 나름대로 흠잡을 데 없는 정도의 스테이크였다. 겉의 크러스트가 조금 더 바삭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가면서 물어보니 역시 고기가 두껍지 않으므로 원하는 정도로 익히면서 크러스트를 바삭하게 만드는 건 그렇게 쉽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이것이 바로 작은 덩어리의 코스용 스테이크를 익히는 데 따르는 애로사항이다. 사진의 스테이크는 200g을 조금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간이 내가 스테이크에 삼는 기준에서는 약한 편이었는데,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다기 보다 셰프님의 취향이 이 정도라고 들었다. 청하면 따로 게랑드 소금을 내온다.
주워듣기로 이곳의 쪽파 샐러드(6,000)가 재미있다고 해서 시켜보았는데 적당히 새콤달콤해서 우리나라 스테이크 손님의 입맛에 잘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들갑들 떠실 정도는 아닌 것 같고.
마지막으로 디저트, 커피는 캡슐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무난했고, 디저트는 무려 스콘과 라즈베리(크랜베리?) 타르트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다. 스테이크를 먹고 나서 스콘이라니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어 타르트라는 것을 주문했으나, 그 또한 내가 아는 타르트와 서울에서 거제도만큼 멀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완전한 ‘미스 매치’였다. 하다 못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라도 내놓았다면 이보다 나았을 것이다. 레스토랑 측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내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괴로운 게 맛없는 음식을 먹고 글 쓰는 것이다. 돈은 돈대로 버리고, 또 왜 맛없는지 구구절절이 정당화하는 글을 쓰느라 이중, 삼중의 고통에 몸부림치게 된다. 좋았던 것에 대해서 말하는 건 아무래도 힘이 좀 덜 든다. 그런 측면에서 ‘더 반’의 음식은 괴롭지 않은 경험이었다. 음식 만드는 건 어렵다. 그러나 또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안 되는 것, 못하는 것, 자기가 아닌 걸 억지로 흉내 내서 하지 않고 자신인 것에 최선을 다 하면 된다. 이게 웃기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요리에 관련된 리얼리티 쇼를 보다 보면 심사평에서 ‘Don’t try to do too much’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려다가 말도 안 되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차라리 기본에 충실한 이날의 점심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얼마만큼 평탄하고 꾸준하게 음식을 만드는지, 또 디저트는 보강했는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또 찾아가 확인할 생각이다.
사족: 와인 수입하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스테이크하우스라면 와인 리스트가 훨씬 더 많이 다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몰랐는데 이날따라 사진이 너무 많이 흔들렸다. 사진 찍는 걸 보여주지 않으려고 너무 빨리 찍어대서 그런 듯.
# by bluexmas | 2011/02/01 10:09 | Taste | 트랙백 | 덧글(9)
같이 시켰던 피자도 별로였는데, 나중에 폭풍검색해보니 의외로 평판이 좋은 레스토랑이라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흔들리는 사진이지만, 고기와 감자 둘 다 정말 맛있어 보여요. 언제 한 번 가봐야겠어요!
초첨이 조금 안맞았지만 쪽파샐러드의 사진을보니 정말 먹음직 스럽습니다. 어떤 소스를 썼는지, 어떤 느낌의 맛이었는지를 조금 더 서술해주셨으면 하고 욕심을 부려보게 되네요.
치아바타는 샌드위치용으로 쓰는게 더 좋아보이는 정도의 퀄리티로 보이지만 올리브의 인서트는 맘에듭니다.
식전빵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이한 취향을 가진 저로서는 OLA의 식전빵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 취향차이겠지만요.
감자수프는 정말 흥미롭군요. 보통 이 계절에는 감자그라탕으로 밸런스를 맞추는 편인데 좀더 퓨어한 맛을 낼 수 있는 테크닉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파 덕분일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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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은 2002년에 며칠 가봤는데 물론 또 가보고 싶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