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eudo Compartmentalization
집에 컴퓨터를 켠다. 부팅하는 동안 씼는다. 소파에 가면 늘어질게 뻔하므로 바로 책상에 앉는다. 일을 시작한다. 머리는 오전에 집을 나설 때 이미 멈춰 있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몸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시간에 머리를 쓰는 일을 한다. 쪼개서 적재적소에 채워 넣는다. 정확하게 compartmentalization은 아니지만 뭐 그거랑 비슷하다. 귀찮음이나 피곤함을 무릅쓰거나 부정하고 뭔가를 계속해서 꾸역꾸역 할 수 있는 상황을 좋아하는데 이건 사실 그렇게 현명한 판단은 아니다. 머리가 좋은 또는 내 나이에 맞는 현실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익을 예상한 다음에 행동을 취할 것이다. 투자대비 최고의 이득을 거둘 수 있는 방향으로… 그러나 나는 어째 그런 걸 잘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뿌듯함은 사실상 마이너스나 다름 없다. 그래도 난 아직 마이너스 통장은 없다. 아마 자격 미달이겠지. 물론 물어본 적은 없다.
세 시간 사십 분쯤 자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알면서도 그 전날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점심 자리를 예약했다. 시간이 없어 쓰지 못하는 동안 세 군데의 양식당과 한 군데의 일식당 음식이 기억 속에서 먼지가 되어가고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솔직히 그런 자리들이 즐거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득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그러한 식사자리는 정말 순수한 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일이라면 하기 싫거나 못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해야 한다. 다만 잠을 많이 못자면 감각이 평소보다 무딜 수 있기 때문에 인식해야하는 것보다 덜 인식할까봐 걱정이 될 때는 있다. 내 돈을 내고 먹는다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이성적이거나 객관적이지 못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돈이 아깝다고 멀쩡한 사람 장사까지 못하게 할 이유는 없다. 나 아니라 누구의 손에도 그러한 권력이 떨어져서는 안된다. 오늘 점심은 비교적 긍정적인 ‘나이브’함이 원동력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긍정적인 나이브함은 부정적인 나이브함보다는 말마따나 긍정적이다. 그 둘의 차이는… 저녁 아홉 시부터 전투적인 의욕에 찬 채로 시작한 일은 결국 새벽 다섯 시 반에나 끝이 났다. 정말 어제 오늘은 새끼손톱만한 게으름도, 몸과 마음 다 통틀어 부린 적 없는데도 그랬다. 근데 내가 무슨 펀드 매니저나 컨설턴트 이런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는 일이 송구스럽기까지 한 이유는 1. 그가 나보다 더 만만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2.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다고 계속 스스로를 정당화시키지만 사실 그보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에게는 나의 어려움을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럼 결국 나보다 힘들지 않은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삶의 어려움이라는 것을 객관적인 준거에 의해 정량화해서 순위를 매기는 것이 가능하거나 아니면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추운 날씨에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사먹을 돈 버느라 힘든 반면 누군가는 추운 날씨를 피해 따뜻한 나라에 가서 여행을 다니는데 가지고 간 가이드북이 생각보다 업데이트가 안 되어 길을 잃어 힘들다. 요즘 세상에 전자와 후자를 단순 비교해서 후자를 힘들다고 말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일까? 물론, 나는 후자의 인생을 살 가능성이 없고 또 후자의 편을 들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1.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도 송구스러울 수 있다, 와 2. 인간관계에서 수요와 공급은 딱딱 맞물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엇갈림과 머뭇거림과 같은 인자들 때문이다. 삶을 아름답게도 또 추하게도 보이게 만들 수 있는 양날의 칼과 같은 인자들이다. 애틋하다고 느끼면 전자, 답답하다고 느끼면… 후자이다. 원통하거나 분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처럼 하얀 자아도취의 굵은 소금에 완전히 파묻혀 푹 쩔어버린 자반고등어의 몸과 마음으로 일을 마친 뒤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광화문에 다다랐다. 정기용 전시회를 한 번 더 볼까 망설이다가 생각을 접고는 지하도를 건너 세종문화회관으로 가 계단의 사진을 찍었다. 잘못 든 출구쪽에서 난민을 위해 서명해달라는 유니셰프 알바생들에게 “사실은 제가 난민이에요”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추운데 남 짜증나게 하면 벌받을 것 같았다. 계단은 언제나처럼 광활하지만 비어 있었다. 빈 계단에 대한 글을 쓰려 한다. 언젠가는 그 건너편의 “광장”에 대한 글도 써야 한다. 모두들 앞다투어 그 “광장”을 씹을때 나는 참고 아껴두었다. 남들 다 할 때하면 재미없기 때문이다. 이번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대로 교보를 거쳐 낙원상가 지하시장까지 걸어가 청국장으로 저녁을 먹었다. 일미 식당은 리노베이션으로 넓어졌고 평면 텔레비젼을 걸어놓았는데 마침 아이언맨이 방영중이었다. 손님이라고는 나와 부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젊고 늙은 남자였는데, 늙은 남자의 목소리만으로 식당은 꽉 찼다. 그가 냅킨을 쓰고 내 발밑의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은근히 거슬렸다. 거기까지 굳이 간 이유는 동물성 단백질을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집에서 제대로 된 밥을 해먹지 못한 것도 이유였다. 후라이는 절대 아닌 계란 부침이 하나 딸려 나왔다. 왕십리에도 그렇게 밥을 내놓는 집이 있었다. 풋고추와 된장, 계란부침 뭐 그런 반찬의 백반집이었다. 주인아저씨를 닮은 딸이
5,6호선을 갈아타고 홍대로 건너와 커피를 마셨다.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는데 개그우먼 이@미였다. 머리 속으로 뜬금 없이 ‘해이 해이 해야~’ 가 “부금”으로 흘러갔다. 아주 여유 있게 길을 나서 6호선과 4호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현실성없는 인간답게 돈과 시간을 더 써서 서울역으로 간 이유는, 영등포로 가는 것이 너무 지겨웠기 때문이었다. 중간지점에서 중간지점까지 기차를 타는 게 싫었다. 떠나는 기분을 느끼는 출발지점에서 떠나는 작은 사치를 누리고 싶었다. 서울역의 물레방아를 잠시 노려보다가 7번 플랫폼으로 향했다. 100% 우리쌀로 만들었다는 설악산 단풍빵을, 글쓰기의 소재로 삼기 위해 살까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말았다. 아주 오랜만에 Carcass의 <Necroticism – Descanting the Insalubrious>를 전곡 감상하며 교보에서 산 잡지를 읽었다. 기차가 수원에 이를때쯤 잡지를 다 읽었고 두통과 구토가 몰려왔다. [여기서 아주 잠깐 뜬금없이 광고!]혹시, 이제는 케케묵은 비밀을 털어 놓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계십니까? 모든 종류의 정신적, 육체적 배설이 당신을 카타르시스의 신천지로 사뿐사뿐 모셔다주는 “매직 카펫 라이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왜 호떡믹스 광고를 대문짝만하게 하고 계시겠습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강도의 카타르시스는 이제 반달곰처럼 천연기념물이라는 걸, 실망스럽더라도 받아들이세요.
# by bluexmas | 2011/01/27 00:10 | Life | 트랙백 | 덧글(5)
오밤중에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서 댓글 달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