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집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긴 하루였다. 며칠 동안 짧은 글도 쓸 여유가 없었다. 짧게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은 집으로 끌고 들어오면 안 된다. 맨날 디자인 해대겠다고 갈아엎어대는 바깥보다 집이 난장판이더라도 끌고 들어오면 안 되는 뭐 그런 것들이 있다. 그래서 계속 망설이면서도 강을 건너는 버스를 탔다. 며칠 전에 아랫입술을 정말 배고파 씹어먹는 기세로 씹었더니 그래도 헐어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새벽 두 시에 양치질을 하고 알보칠을 바르면 피가 거꾸로 솟으며 삶은 잠시 잠깐 생지옥이 된다. 그럴때 욕은 화장실에서 나와 하는 것이 좋다. 울리면 민망하니까.

일민미술관에서 건축가 정기용의 전시를 보았다. 그의 이름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지만, 건물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를 폄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억이라도 해야 폄하를 하거나 말거나 하지. 그냥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이 백지상태였다. 가서 둘러보아도 계속 좀 그랬다. 늘 그렇듯 머리가 아파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내가 왜 외부의 요인에 상관없이 언젠가는 건축을 그만두리라고 생각했을지,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표현하는 매체 또는 방식이 물질적인 것, 또한 그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스케일보다 큰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부담을 느꼈다. 그런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면 완벽하거나, 아니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못하거나 자각하더라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사람은 늘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므로 1번 조건을 제끼면 2번이나 3번이 되어야만 하는데 둘 다 할 수 없게 만들어진 인간이었다 나는.

뭐 그런 것이었다. 건축을 잘 하는 사람이 부럽지는 않다. 나는 내가 만들고 있는 세계에 만족하니까. 하지만 자신이 건축을 잘 한다고 믿는 사람은 부럽다.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세계가 개인적이며 작고, 또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에 만족한다(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하철역 디자인을 비판하는 글에 빌붙어 자신의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사람들께서는 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러고 싶다면 직접 써서 하시라. 작은 것을 소재 삼아 작은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더니 왜 거기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붙이시나? 나는 MBC 뉴스데스크의 기사처럼 이슈를 만들기 위해서 트위터를 하는 게 아니다. 배설하기 위해서 한다) .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의 세계는 어쩌면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 내 삶은 그저 삶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떡허니 광고에 내보내지. 평생 일하시느라 피곤하실텐데 그냥 좀 쉬시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점심을 사먹었더니 저녁도 사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간식으로 먹는 치즈를 냉장고에서 꺼내 놓았으나 또 챙겨서 나오지 않았다.편의점에서 똑같은 걸 사서 먹었다. 커피나 한 잔 마시고 늦더라도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새로 생긴 스시집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대로 들어가서 날것으로 배를 채웠다. 만족스러웠다. 여기에서 얻은 만족은 그 음식만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상황과 음식이 가지고 있는 상황이 적당한 선에서 만나서 빚어낸 만족임을 의미한다. 그대로 건너가 커피를 두 잔 마셨다. 습관적으로 서울역에서 타는 기차표를 샀는데 막상 자리를 뜨니 서울역으로 가기에는 빠듯하고 영등포역으로 가기에는 남는. 그런 어중간한 시간대였다.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었다. 부츠 안에서 발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긴 하루였다. 글자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은 아무런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지어진, 그것도 허구인 이야기는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정해졌지만 정해지지 않은 것같은 느낌이 들고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그리고 실제인 내 삶은 넘길 책장이 적어도 반은 더 남아 있는데 벌써 다 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by bluexmas | 2011/01/07 22:46 | Lif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by Bonvivant at 2011/01/08 01:00 

부츠 안에서 발이 부풀어오르고, 지쳐서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상황, 넘 동감되어요. 그런 만큼 내 공간에 들어왔을 때 더행복하잖아요^^ 좋은 밤 되시길!!!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1/13 11:46

네^^

 Commented by cleo at 2011/01/08 23:37 

건축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데 부담(한계?) 느낀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건축가의 의지대로 건축물이 완성되는게 현실적 불가능한 작업이 아닐까요?

(특히, 보기흉한 건축물들로 이미 점령당한 아~ xxxx에서라면요..-.-)

메디치가문의 후원을 받았던 브루넬레스코,

나폴레옹3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오스망 남작,

구엘의 이상을 그대로 도시에 구현한 가우디..

그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제가 공자 앞에서 문자를 읊고 있는 듯…-.-;; )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세계에 머물면서 뭔가 창조적이고.. 가장 나다운 일을 찾는 거.

그것이 평생의 과업일텐데 블루마스님은 그걸 계속 찾고 계시는 듯 합니다.

벌써 다 정해진 건 아닐꺼구요..

아~ 여기서 이렇게 심각한 덧글 쓰는 거 참 부담스럽군요-.-

그래도 계속 덧글쓰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생각나는대로.. 주절주절.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1/13 11:46

그런 측면도 있지만 물질적인 것, 사람보다 큰 것을 만들어 내는 게 부담스럽더라구요.

부담스럽기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