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는 폭식도 코스로
뭐 그냥 대강 먹을까, 좀 망설이다가 사발통신을 돌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비밀시식단을 급히 소집했다. 작년에 너무 말도 안 되는 코스를 짜서 실천하느라 과로사할 뻔 했던 경험을 교훈삼아, 작년의 크리스마스 식단은 상대적으로 조촐했다.
성탄축하를 빙자해 탄수화물 과다 섭취를 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는 마늘빵. 요즘 가장 맛있는 빵이라고 생각하는 에릭 케제르의 치아바타(라고 솔직히 생각하지 않지만…)로 만들었다. 마늘빵을 만드는 두세가지 방법을 알고 있는데, 이건 올리브기름에 다진 마늘을 아주 약한 불로 볶고, 거기에 버터와 소금, 후추, 파슬리를 섞어 잠시 굳혔다가 빵에 바르고 구운 것이다. 물론 원한다면 얼마든지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전채는 백화점 지하에서 산 자연산 방어와 자몽, 미나리의 카르파치오. 이날 먹었던 것 가운데 가장 만들어보고 싶고 또 맛이 궁금했던 음식이었다. 방어가 기름진 생선이니만큼 적당한 신맛에 두드러지지만 거슬리지 않는 쓴맛의 자몽과 궁합이 잘 맞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미나리는 향을 더하고 싶어 우리나라식 회무침에서 빌려온 요소. 지난번에 광어로 세비체를 만들어 먹을 때, 미나리의 부재에 아쉬워했던 터라 잊지 않고 곁들였다. 산을 얼마나 써야 될지 몰라 레시피를 뒤져보다가 귀찮아서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만들었다. 자몽즙에 레몬즙을 조금 더해 액센트를 주었다. 여기에 쓴 자몽은 ‘스위티’라고 불리는 녹색 자몽인데 보통 자몽보다 훨씬 더 달다. 덕분에 자몽이 살짝 묻히는 느낌. 보통 자몽이 오히려 더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내 취향의 음식이다. 재료에 손 많이 대지 않고, 산이 좀 두드러지며 차림도 웬만하면 단순하게 가는 식이다. 자몽 제스트와 천일염을 더했다.
같이 마신 술은 여름에 아무개님께 선물 받은 뵈브 클리코. 좋은 걸 주셨으면 이런 날 신경 써서 만든 음식이랑 같이 먹음으로써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이…
다음은 빵에 넣은 버섯 수프. 다음 차례인 홍대 앞의 모 레스토랑에서 영하 13도의 날에 찬 전채를 몇 종류나 먹고서 “시장 봐 오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서 메뉴는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레스토랑에서 그런 날씨에 대한 고려도 전혀 없이 원래 내던 차가운 음식만을 내는 이유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가 먹고 싶어서 만드는 코스에는 수프를 꼭 끼워주고 싶었다. 꽤 많은 양의 샬럿을 은은한 불에 올려 버터로 오래 볶다가 양송이와 표고를 더하고, 닭육수를 더해 끓이다가 손 블렌더로 갈아주었다. 싸게 파는 닭 통다리를 사다가 살을 발라내고, 남은 뼈로 국물도 직접 끓였다. 직접 만들까, 망설이다가 죽고 싶지 않아서 에릭 케제르의 신세를 졌는데, 이 빵도 굉장히 맛있었다. 물기가 많은 반죽이었는지 구멍이 컸는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치아바타와 마찬가지로 적당한 신맛이 도는 게 발효가 잘 된 느낌이었다. 남은 표고를 볶아 고명으로 얹었다.
뭔가 주요리를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좀 무거운 파스타를 만드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러기에 큼지막한 미트볼을 넣은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만큼 제격인 것도 없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반씩 섞고, 빵을 우유에 갠 ‘파나드’를 만들어 촉촉함을 더했다. 계란은 갈라 노른자만 넣는다. 골프공 만하게 빚어 튀기다시피 구운 뒤, 미트볼은 건져내고 토마토소스를 볶아 파스타와 섞는다. 간이 좀 딸렸다.
같이 마신 술은 몇몇 분들에게는 친숙할지 모르는 ‘Mas Rabell.’ 기회가 닿으면 다음에는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와 함께…
내가 짜는 코스에는 후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의 코스는 짜임새라는 것이 끝까지 없었다. 전혀 뜬금없는 파인애플 업사이드 다운 케이크. 무쇠팬에 굽는 미국 시골풍. 파인애플은 열대과일이지만 이런 디저트를 만들어 놓으면 이상하게도 겨울 느낌이 난다. 파인애플을 꿀과 버번에 재워두었다가 조려 바닥에 깔았다.
뭐 이렇게 먹고 마시며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 by bluexmas | 2011/01/03 09:37 | Taste | 트랙백 | 덧글(23)
몇가지 아이디어는 저도 좀 따라 해봐야겠습니다. 비슷하게 되진 않겠지만;;
그 모임에 들려면 무슨 자격같은 걸 가져야할 거 같군요-.-
(예를 들면.. ‘절대 미각’의 소유자라든지… )
다 맛나보여요!
블루마스님 만들어주신 음식 먹어본 지도 어언 6개월..
조만간 기회가 생기겠지요? ㅎㅎ
님 정체가 머임
쓸데없는게 꼭 하나씩 껴들어간 가격만 딥따 비싼 식당 코스보다 훨씬 좋아요, 게다가 빵만 세 번이야 ㅠ ㅠ
스테이크같은 디저트가 심금을 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