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말, 개인적으로는 볼 가치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온갖 시상식들이 화면 속에서 펼쳐지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관심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연말에도 볼 가치가 전혀 없다. 대신 내가 혼자 벌이는 시상식은 이름하여 <올해의 악몽 대상>. 자! 올해의 악몽 대상 시상식, 그 영예의 대상은(드럼 롤… 이거 할줄 알아야 군악대 갈 수 있다고 누가 그랬는데? 그래서 못 가는 사람이 있다고도 했지 그 분은 나중에 전혀 엉뚱한 음악 장르의 아이콘이 되신다) !

굳이 이 따위 질 떨어지는, 그리고 영예도 안 주어지는 시상식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그 영예의 대상 꿈을 바로 오늘 아침에 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에서 일찍 깨어야만 했다. 그 악몽의 현실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악몽을 꾸고도 결론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악몽이 현실이 아니고 그저 악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악몽이 현실로 상영중인 현실보다 악몽이 현실에서 간판을 내리고 악몽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라면 그래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예의 대상 악몽의 소감을 들어보자: “그래도 제가 그저 악몽일 뿐이어서 얼마나 행복한지요. 그 행복한 마음으로 이 상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그래 뭐, 아름다운 밤이기는 하지,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잠에서 일찍 깬 덕분에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 머리를 자르러 갔다. 차를 안 가지고 오리역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다. 모란에 있는 터미널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지하철을 타고 내려가야만 한다. 그래도 꼭 그러고 싶었다. 의식까지는 아니어도 한 해를 마감하는 차원에서 할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가식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 겉으로 잘 보이기 위해 머리를 자르지, 절대 내적인 청결함을 유지하고자 청소를 하지는 않지만… 외출은 모처의 맛있는 커피 두 잔으로 아름답게 막을 내렸다. 올 한해라면 그럴 자격쯤은 있다고 생각했다.

올해를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어떤 단어가 가장 잘 맞을까… 하루 종일 생각해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두 단어가 생각났다. <기대와 실망>. 사실 영어로는 한 단어로 압축이 가능하다. 이름하여 ‘anticipointment.’ 웃기지만 말은 된다. 그래서 저 단어가 올해가 될 뻔 했다. 그러나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 기대와 실망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배운 것이 많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올해는 <배움>의 해가 되었다.

사실 올해가 <배움>의 해였다는 건 그만큼 고통의 해도 될 수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배움에는 고통이 따른다. 쉽게 배우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는 사실 그렇지 못하다. 늘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 사실 기대와 실망의 과정 그 자체에는 많은 고통이 따른다. 실망의 고통보다 어쩌면 기대의 고통이 더 크다.

그러한 한 해였다. 올해가 가는 건 사실 좀 아쉽다. 별 이유는 없고, 다만 2010의 영어 표기 “Twenty-ten”이 왠지 미끈하게 느껴졌는데 그걸 보내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계속 읊어봤는데 이런 느낌을 주는 해가 다시 올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아예 안 올지도 모르겠다.

내 블로그지만 이제는 나도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분명히 5년전 이맘때 썼던 결산 글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찾지 못했다. 물론 다시 찾아보기는 귀찮다. 기억하기로 껍질을 벗는 이야기를 썼던 것 같다. 발뒷꿈치에 마지막으로 남은 껍데기를 날카로운 기억의 조각으로 억지로 벗겨내고 났더니 눈밭에 핏자국으로 흔적이 남더라… 뭐 이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아직도 충분히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은 안 들고, 어쩌면 사는 내내 그런 생각을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왠지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져 그때의 나를 조금 더 가까이 오라고 해서 한 번 정도 안아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실패자였고, 또한 지금의 나는 아직도 자기애를 그런 식으로 발현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먹통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게 하나의 껍데기 안에서 둘이 싸워왔다. 내년의 소망을 생각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나처럼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나이 한 살 더 먹으니 old and wise, 더 겸손하고 느긋한 인간이 되어야지’하는 꼰대스런 나와, ‘아 한 살 더 먹었으니 그만큼 더 싸가지없고 못되게 살고 싶구나’라는 욕망에 불타는 내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서로 다른 회색 shades of gray의 감정들을 음미하면서 살고 싶은 내 껍데기는 그 둘의 싸움터를 추운 눈밭으로 옮겨 놓고 그저 술이나 한 잔 했으면,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껍데기만 있으니 그렇게 많이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종소리는 듣지 않아도 된다. 눈밭 저 멀리에서 구경하는 당신은, 그때의 나인가?

그래도 없으면 섭섭한 올해의 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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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bluexmas | 2010/12/31 22:47 | Life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at 2011/01/03 00:0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1/04 10:06

에 뭐 삶의 일부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