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dy Double for Christmas
주사기를 팔뚝에 꽂기 직전, 나는 그를 다시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물론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아니다. 눈이 그런 표정을 담고 있었다는 것 뿐.
사실 그게 그를 고용한 이유였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글만 쓴다고, 나의 이메일에 답했다. 그런, 강요된 침묵이 마음에 들어 그를 고용했다. 선택된 침묵이라면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다. 사회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침묵을 선택해서 지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대부분 사회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수도원이나 절 가운데서도 엄격한 규율로 운영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물론 그래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는 24일 아침에 찾아와 주사를 놓아주고 깨어나는 26일 아침까지 내 행세를 한다. 올해로 두 번째다. 허허벌판 한가운데 살때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창문을 닫고 밖을 바라보면 어떤 것의 움직임도 포착해야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고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차라리 잠들어 있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얼굴이 드러나는 일이 아니므로 대역을 찾기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일이라봐야 하루에 한두 개 꼴로 글을 올리고 덧글을 다는 것 뿐이었다. 올해부터는 트위터가 있으므로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보수에 10%를 더 얹었고 그 전 주에 만들어 놓은 음식 사진을 아이폰으로 찍어 시간 별로 올리라고 일러두었다.
그가 바늘을 꽂았다 빼자 바로 의식이 흐려졌다. 꼭 이래야 될 필요가 있을까. 몽롱한 가운데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지 말아야 할 필요도 딱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불을 켜놓아도 괜찮고 꺼놓아도 괜찮은 상황이라면 많은 사람들은 그냥 끄는 편을 택할 것이다. 그래야 전기, 그러니까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말하자면 그런 상황이었다. 물론 꺼놓기 위해 다른 에너지를 동원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런 식의 비유는 딱히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뭐
‘Body Double’은 대학원에서 Theory & Criticism I을 가르쳤던 Mark Cottle의 전시회 제목에서 빌어왔다. 여기에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솔직히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이해 못 하겠는데 뭔가 읽었던 것 기억도 안 나고 찾아볼 수도 없고…
# by bluexmas | 2010/12/26 05:49 | —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