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열기/닫기의 문제
굳이 영역본을 읽겠다고 생각한 건, 작년에 뵈었던 아무개님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우리말로 번역된 걸 읽으면 왠지 그 옛날 읽었던 것들의 찌든 기억이 다시 살아날까봐 좀 두렵기도 했다. 그렇다고 뭔가를 기억하고 있느냐면 사실 그런 것도 아니다. 이 글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소설로는 무려 15년 만의 하루키다. <카프카>를 읽으면서 옛 기억을 열심히 떠올려 봤는데,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머리가죽 벗기는 장면과 여자 등장인물의 팬티에 관한 묘사뿐이었다. 둘 다 <태엽 감는 새>의 장면이었던 듯. 마흔이 내일 모레인 이 시점에서 하루키를 읽으니 언젠가는 더 강한 느낌으로 다가오던 폭력과 섹스의 장면들에 의외로 별 느낌이 없었다. 그냥 ‘아 이건 그냥 다 장치야, 장치라구’라는, 몰입보다 거리두기의 암시를 속으로 계속해서 되뇐달까.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이 보았기 때문에 처음 1/3까지는 별 연관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서로 얽히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차 이 사건들이 얽힐 거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얽히는지가 궁금해져 차츰 속도와 시간을 더 들였고, 결국 어제 반 정도를 그대로 쭉 읽어서 끝을 냈다(우리나라에서는 두 권으로 나뉘어 나왔던 영역본은 480쪽이 조금 넘는다).
개인적으로는 시작할 때 작가가 열어놓은 뚜껑들이 모두 닫히면서 마무리되는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지나치게 개입해서, 독자가 상상력을 발휘할 즐거움을 앗아간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열린 결말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열린 상태를 0, 닫힌 상태를 100이라고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상태는 70~75정도가 될 것이다. 말로 표현하자면 ‘독자가 잘 못 느끼는 어느 부분이 열려 있는 채로 마무리 되는 상태’랄까.
그래서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서 종반으로 향하면서 계속 ‘아 이쯤 되면 이제 슬슬 닫는 분위기로 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하루키는 열어놓은 걸 닫기는커녕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연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상태를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열린 채로 그냥 남아 있는데 이게 의도적인 방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욕심이 생겨 열어놓은 이것저것을 결국 수습하지 못한 상태? 게다가 중간에 칼인지 총에 대한 인용(둘 가운데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귀찮아서 뒤져보기는 싫다. 뭐 어쨌든 총이든 칼이든, 이야기에 등장했으면 사람을 찌르거나 쏘아야 한다는 뭐 그런… 아마도 극중 존재의 의미 또는 개연성에 관한 이야기겠지)
물론 위대한 하루키님이시기 때문에 불초소생이 헤아리지 못하는 어떤 의도를 부목 삼아 그러한 상태를 야기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워낙 위대한 분이므로 불초소생이 이렇게 개발새발 독후감이라고 쓰면서 허접한 주장을 펼쳐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독후감이랍시고 죽 쓰고 나니 정작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의 구성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아마도 등장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책장이 넘어갈수록 속도를 붙이도록 만들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 구성 또는 전개에 대한 궁금증이었지, 등장인물의 성장이나 운명에 대한 그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측면에서도, 하루키는 독자들이 거리를 두도록 각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며 특징을 설정했는지도 모르겠다(오시마의 ‘양성성’은 정말 장식 외에 어떤 의도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혈우병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한데 굳이 한 꺼풀 더 씌울 필요는 있었던 것일까?).
일부러 영역본을 읽었으니 그 소감을 또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는데, 적다고 할 수 없는 분량을 그래도 빠르게 읽을 수 있었던 건 짧고 복잡하지 않으면서 속도감이 느껴지는 문장 덕분이었다. 너무 오래 전의 기억이라 한역본의 문장들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물론 일-한 번역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관계대명사를 징하게 써서 길고 복잡한 문장들의 호흡을 웬만하면 끊지 않고 강박적으로 남겨 ‘번역 초짜/구어체 같다’라고 욕을 먹은 내 경우를 생각해 볼 때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을 듯?), 영어로 번역된 문장에서 ‘의도적으로 이런 느낌으로 가야 되겠다’라는 의도가 왠지 엿보이는 듯했다. 아마 그것이 번역인 듯.
일본 사람은 아니지만 미국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일본 문화에 대해서 친숙하고 그의 책도 오래 전이지만 몇 권 읽어보았으니, 그런 상태에서 책을 읽는 나는 미국와 일본과 한국을 꼭짓점으로 삼아 그린 삼각형의 가운데에서 어중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떠한 이유로 그랬든 열 일 제쳐두고 몰두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면,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덕분에 오늘까지 넘겨야 되는 일을 새벽까지 하는 대가를 치렀지만, 그래도 좋았다.
다음 책: 피터 회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영역본)>
*그나저나 이 표지 디자인은 대체 뭐냐… 나는 대체 이해를 못 해먹겠다-_-
# by bluexmas | 2010/11/30 00:05 | Book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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