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동선 해설

오산 집에서 출발, 여유있게 시간을 두고 나와 역까지 걷는다. 표는 벌써 사 둔 상태. 역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도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상큼하게 며칠 전 어른에게 받은 펫 숍 보이스(영국 형들이므로 펫 ‘샵’ 보이스라고 하면 안된다) 라이브 앨범을 듣는다. 기차 안에서 책을 읽는다. 평온한 금요일 오전.

서울역 점심 예약해둔 시간까지 45분쯤 남아 있다. 장소는 인사동. 걷기 시작한다.

인사동 정시에 도착. 단체 예약 손님과 우르르 몰려 들어간다. 일부러 멀리 떨어져 혼자 왔다고 말한다. 옆자리엔 사업차 한국을 온 듯한 외국인을 데려온 일행이 있는데, 한 사람-맨 밑 서열-이 주로 영어를 하는 분위기. 더덕이 나왔는데 영어를 하던 남자가 “아 이거 영어로 뭔지 잘 기억이 안나” 라고 말하자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던 두 남자들 가운데 한 명이 “low level ginseng”이라고 한마디 툭, 던진다. 그 다음에는 마가 나왔는데 외국인이 안 먹자 영어맨이 “it is good for ‘standing'”이라고 말한다. ‘Erection’이겠지, 이 사람아. 사찰음식이라… 속세 입맛의 업보가 참으로 질기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달 수 없다.

교보문고 잡지 한 권을 산다. 요즘 채식 베이킹에 관심이 많아서 책을 들여다본다. 한숨이 나온다.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구나.

롯데호텔 여기 화장실이 근방에서는 가장 좋다. 겨울에는 따뜻하다(…)

롯데백화점 어디에서 본 무엇인가를 찾아 헤멘다. 그러나 없다. 얼마 전에 비해 남성복 매장에는 코트가 더 많이 늘었다. 이월 상품으로 산 것과 똑같은 코트가 신상품이라며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는 걸 보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게다가 내 코트는… 더 언급하지 않으련다. 다른 옷은 비싸다고 생각하지만 남성 겨울 코트는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들의 가격대 성능비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명품은 잘 모른다). 폴로 매장 같은데 들어가면 맨날 웃게 되는데, 거기 모직 코트는 정말 구호물자 담요 같은 질감이다. 남자 코트라봐야 스타일이 거기에서 거기니까 가격대 정해놓고 잘 맞는 브랜드에서 사면 되지 않을까 싶다. 가장 기본 코트는 정말 모든 매장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주 고객층에 따라 허리가 더 들어간다거나 안 들어간다거나 뭐 이런 식이다.

명동 유니클로 몇 벌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나는 유니클로를 입으면 우스워 보인다. 지금은 살이 쪄서 더하다. 마음에 드는 “후리스”를 발견했으나 맞지 않는다. 이건 살을 빼도 마찬가지일거다…라고 스스로 위안은 했지만 그래도 슬프다T_T

스파오 더 이상 삼각 팬티가 나오지 않는가 보다. 더 슬퍼진다. 거기 팬티가 그래도 훌륭했는데… 비싼 팬티는 돈이 없어 못 입는 게 아니다, 몸이 없어서다. 아니, 구려서다. 몸의 경우 없다=구리다.

T월드 여름에 잃어버린 멤버십카드를 재발급 받았다. 포인트를 홀랑 다 써버리고 아이폰으로 넘어갈테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맛있는 커피를 마셔야 될 것 같아서 홍대 앞으로 향한다. 원래의 계획은 기차 시간보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서울역으로 향해서, 거기 롯데마트에서 장을 가볍게 보는 것이었다. 파는 양지가 구워먹을만 해 보였기 때문이다.우리나라에서 파는 양지는 대부분 기름기가 너무 없어서 구워먹을 수 없다. 하물며 국은 끓여먹을 수 있을까? 시간이 너무 많이 남을 것 같아서 그냥 커피를 마시러 간다. 돈은 없어도 눈은 즐거울 수 있으니 윈도우 쇼핑을 할까 했으나 채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 저런 것들 사봐야 다 별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쇼핑의 원동력도 허무함이지만, 쇼핑을 물리치는 원동력 또한 허무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쇼핑은 사정과도 같다. 시스템을 떠나면 급격히 허무해진다. 그 전까지는 여건이 된다면 바로 또 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한 즐겁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피곤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돈>단백질인데, 몇몇 사람들에게는 상황이 뒤바뀌어 있다. 돈도 단백질도 없으면 남자로서 좀 서글프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홍대앞 커피를 즐긴다. 들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차표를 전화기로 예매한다. 계획보다 한 시간 빠른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어진다.

영등포 지난 번에는 영등포의 존재를 잊고 홍대에서 서울역을 가는 병신짓을 했으나 영등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다만 내가 그 존재를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영등포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신도림역에서 전철을 기다린다.

타임스퀘어 순간 쇼핑병이 도진다. 무엇인가를 찾아보았으나 아예 매장조차 없다. 이마트로 향해 고기를 들여다본다. 덩어리째 구우면 끝내주는 ‘척’이 있길래 스테이크 말고 덩어리로 살 수 있는지 물어보자 매장에 있던 아주머니가 누군가를 열심히 부른다. 기차 시간이 다가오고 마음이 급해진다. 스테이크 썰어 놓은 단면의 넓이를 보니 덩어리로 사려면 한 오만원 어치는 사야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 다시 양지로 급선회, 한 1킬로그램 정도 사고 싶었으나 그 정도 크기의 덩어리는 없다. 기름기가 많은 오백그램짜리를 집어 들고, 눈에 띄는대로 양파와 감자를 한 봉다리씩 산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아풀싸, 뭔가 풀을 사야 한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신세계 식품매장 백화점으로 넘어왔더니 가격대가 껑충 뛴다. 고민끝에 가장 싼 무 싹을 집는다. 쇠고기랑 무가 잘 어울리기는 한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영등포역 기차 출발 5분전에 도착한다. 기차가 막 들어온다. 어째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시간과 안 맞는다 싶었더니 영등포에서 다른 열차에게 양보하느라 좀 서 있는다. 다이어리가 부록으로 딸린 잡지를 뜯어 읽는다. 이 기차 안에서 한 번 휙, 읽어보면 딱이다. 보통 서울역에서 오산에 가는 만큼을 채워줄 정도인데 오늘은 영등포에서 세마대를 지날때쯤 더 읽을 게 없어진다. 다시 해변의 카프카로 돌아간다.

오산역 영등포까지 오는 와중에 빨리 걸었더니 땀이 났다가 몸이 식어 더 춥게 느껴진다. 버스를 기다리나 오지 않는다. 하루 종일 걸었는데 이만큼은 더 걸을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또 걷는다. 좀 걷다보니 눈 앞으로 버스가 지나간다. 뭐 늘 이렇다. 막판 스퍼트 코스에서 걷는게 지루하다고 느껴질때쯤 저 먼 곳에서 오는 다음 버스가 보이길래 기다렸다가 탄다. 자주 안 타는 번호의 버슨데 운전하는 아줌마는 낯이 익다. 난폭운전이 주특기니까. 딱 5분 탔는데 토할뻔 했다.

 by bluexmas | 2010/11/27 00:02 | Life | 트랙백 | 덧글(14)

 Commented by 홈요리튜나 at 2010/11/27 00:19 

어떤 잘못된 지식이었나요???왠지 궁금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3 10:45

포도씨 기름으로 파이 크러스트 만드는 뭐 그런 거겠죠? 더 많은데 하나하나 늘어놓는 건 준비하고 있는 글에서 밝히죠 뭐~

 Commented by 강우 at 2010/11/27 00:39 

굿 포 스탠딩에서 눈물이-

책과 글은 많아지는데 종종 담긴 무게가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3 10:46

뭐 비슷하지요^^ 거기서 거기인지도요 크크 정보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Commented by 펠로우 at 2010/11/27 00:40 

즐기셨군요^^

홍대쪽보단 딸리지만, 을지입구 근방서 많이 이동하고싶지 않을땐 을지입구 북쪽 페럼타워 1층의 ‘폴 바셋’분점도 있긴합니다.. 리스트레또 식으로 일반 에스프레소의 절반 양만 나오니까, 도피오(더블)로 시켜야합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3 10:47

페럼타워는 한 번 가봐야 되겠습니다. 양이 너무 많은 에스프레소는 이제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듭니다. 거기 지하에도 이것저것 있나보네요.

 Commented at 2010/11/27 00:5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3 10:50

네 싫어해요 크크 그래서 관심있다는 거지요. 얼마나 싫은지 왜 싫은지 보려구요.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11/27 21:12 

서울역에서 인사동까지 걸으셨다구요?…………….흐억.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3 10:50

많이 걷습니다 원래. 오늘은 조금만 걸으려구요. 다음날 힘들더라구요. 요즘은 동네에서 달리기를 합니다.

 Commented by 러움 at 2010/11/28 15:04 

저도 어제 저녁때 타임스퀘어에 갔었는데 언제 들르셨을라나요. ^^ 헤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3 10:50

여섯시 전후에 들렀었어요. 러움님이 근처에 사시나봐요^^

 Commented by 허멜선장 at 2010/11/29 08:54 

Y-써놓고보니 60년대 전후문학분위기가^^-의 글을 읽으니 소설가구보씨의 일일 같군. 아니, ‘파워블로거’ 구보씨의 일일’이라고 할까^^.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3 10:51

P선장님, 저는 이름이 구보는 아니지만 밖에 나가면 구보하듯 걸어서 돌아다니니까 구보라는 이름을 써도 될 것 같습니다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