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산 단호박으로 만든 미친 호박파이

귀찮아서 아무 것도 하기 싫은데 그걸 무릅쓰고 뭔가 만들게 하는 재료를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모 마트에서 발견한 북해도산 단호박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일단 하나 사다가 구워서 먹어봤는데, 이건 좀 너무 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았다. 겨울 내내 들어오는 건지, 아니면 하루 이틀 들어오다 말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파이를 구워보고 싶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파이접시(와 한 무더기의 베이킹 접시-_-)까지 사는 등 난리를 떨었다. 그 결과로 만든 건 정말 지옥에서 온, 미친 파이였다.

‘미국=사과파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사과파이를 비롯한 각종 파이는 미국의 대표 디저트라고 할 수 있다(특히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디저트로 국한시킨다면). 그러나 백만 번 파이 만드는 걸 들여다 보았지만 정작 직접 만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껍데기(크러스트 Crust) 만들기가 생각보다 귀찮으면서도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나의 졸역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에도 제대로 된 파이를 찾는 원작자님의 여정이 구구절절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도 결국 껍데기를 제대로 만드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체면치레는 해야 하므로 파이 속의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아메리카스 테스트 키친에서도 지난 10년동안 매 시즌 최소한 한 번 정도 파이를 만들면서 껍데기의 조리법을 업데이트해 왔다. 그

최신판은 바로 지난 시즌의 것으로, 마지막으로 반죽을 뭉칠때 물과 함께 보드카를 섞는다. 에탄올이 처음 반죽을 뭉칠때에는 넉넉하게 수분을 공급해주지만 구울때에는 오븐의 열에 의해 증발됨으로써 완성된 파이의 맛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 ‘물을 반죽이 겨우 뭉쳐질 정도로만 넣어라’는 대부분의 파이껍데기 조리법에 반하는 것인데, 그렇게 물을 적게 넣었을 경우 반죽이 지나치게 딱딱해서, 휴식을 넉넉히 시킬지라도 얇게 밀기 전에 부서져 버리기가 쉽다. 조리법을 따라 반죽을 만들었는데, 예상외로 잘 뭉쳐지지 않아서 보드카를 조금 더 집어 넣었고 결과는 조금 더 질긴 파이 껍데기가 되어 버렸다. 역시 엄청난 연습이 필요하다.

이 파이가 ‘지옥에서 온 미친 파이’가 되어 버린 건, 사실 껍데기가 아닌 속 때문이었다. 그냥 통조림을 사서 쓰면 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호박파이 만들기가 쉽다. 그게 없다면 일단 호박을 구워서 속을 파내야 되는데, 은근히 귀찮다. 너무 센 불에 구우면 수분이 지나치게 빠져나가 말라버리기 때문에, 인터넷을 한참 뒤져 섭씨 200도를 적정 온도로 정하고 30분 동안 호박을 구웠다. 아울러 설탕을 입힌 얌 yam 통조림도 더하라는데 그것도 없으니 그냥 고구마도 같이 굽는다.

이렇게 호박과 고구마를 구워서 속을 파낸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이 파이의 속은 거의 호박죽에 가깝다. 호박과 고구마에 몇 가지 양념과 설탕, 단풍 시럽, 간 생강 등등을 더한 뒤, 불에 올려 타지 않게 저어주며 한참 끓인다. 크림과 우유, 계란으로 만든 커스터드를 섞어준다. 마지막으로 체에 걸러주는데, 3,000원짜리 초 싸구려 체로 섬유질이 풍부한 호박과 고구마죽을 거른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팔이 빠질 뻔했다.

이렇게 호박고구마죽을 만드는 동안 파이껍데기를 구웠는데, 생각보다 많이 쪼그라들어 놀랐다. 어제 구운 타르트 반죽도 꽤 많이 쪼그라들어서, 일단 버터에 생각보다 물이 많은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온도계로 반죽 가운데의 온도가 80도를 찍을때까지만 굽는다.

사과파이 같은 건 아이스크림이 잘 어울리는데, 호박파이는 밀도가 높고 차갑게 먹는 편이므로 설탕을 거의 안 넣고 올린 크림을 곁들이는 편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만들기가 너무 번거로워서 그냥 내가 먹으려고 만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by bluexmas | 2010/11/22 11:00 | Taste | 트랙백 | 덧글(26)

 Commented at 2010/11/22 13:0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1

앗 그러셨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가끔 잘 읽었다는 말씀을 해 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어찌나 감사한지요. 딱 제 취향의 원작자라 저도 참 좋아합니다. 같은 컨셉트로 나온 책이 한 권 더 있는데 혹시 읽고 싶으시면 출판사에 전화라도 해 주세요… 🙂

 Commented by sonny at 2010/11/26 23:37

아, 번역이 되어 있는 책인가요? 아니면 출판사에 전화해서 번역 좀 해달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요?^^;;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9

모든 것-이 잘 팔리면 저작권 사서 번역하자… 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재판도 못 찍어서 거의 물 건너 갔습니다. 그래도 전화라도 해 주시면… 그 책은 솔직히 제가 사명감을 좀 가지고 있어요. 아예 안 나오면 상관없지만 나온다면 꼭 제 손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같은 포맷이고 역시 <보그>지의 컬럼을 모은거에요. 모든 것 보다 조금 더 요즘 이야기지요. 피자나 초콜렛, 캐비어 등의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요. <It must’ve been something I ate>이라고 합니다.

 Commented by sonny at 2010/11/26 23:47

흥미롭네요! 연락해봐야겠네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54

네 혹시라도 잘 추진되면 밥 사겠습니다^^

 Commented by ALT-MATE at 2010/11/22 18:42 

엄청 수고하셨어요 ‘ㅇ’…손이 엄청 가는 파이네요…와아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1

그냥 쓸데없이 손이 많이 가는 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의 보람은 잘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mesmerizer at 2010/11/22 18:54 

그러게, 손이 많이 가는 파이네요. 맛나보여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2

아직 제가 파이 껍데기는 잘 못 만들어서요. 파이라는게 폼은 안 나지만 역시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Commented at 2010/11/22 21:0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2

쿠키는 언제나 만들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파이 접시도 샀겠다 파이를 열심히 만들어 보고자 노력중에 있습니다.

 Commented at 2010/11/23 00:4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3

이제 우리나라에 계시니 나눠 먹을 수도 있겠네요^^ 이래저래 정착에 문제는 없으신지 모르겠어요. 가끔 소식 들려주세요.

 Commented by 딸기쇼트케이크 at 2010/11/23 01:11 

막만들어먹는 사과파이만 만드는 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인데 호박 파이는 속이 그냥 날을 잡아야 할 수준이네요;; 그래도 맛있겠어요 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3

곧 사과파이도 한 번 만들어보려구요. 좀 높이 솟은 걸로… 사과파이도 쉽지는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Commented by 홈요리튜나 at 2010/11/23 01:23 

커스터드를 섞어 만들어서 훨씬 맛있을 것 같아요 보통 블로그에 돌아다니는 호박파이는 젤라틴으로 굳히는 방법이 많은 것 같던데..팥 넣은 호박범벅 식으로 만들면 씹는 느낌도 있을 것 같고..저도 왠지 형태변형에 도전해보고 싶어졌어요 흐흐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4

크 젤라틴도 쓰는군요. 저 위에 팥 토핑이나 소스를 올려도 괜찮을 것 같네요 정말^^

 Commented at 2010/11/23 09:1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4

그분 책, 엄청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에는 예약 취소 이런 거 없었으면 좋겠네요^^

 Commented by 마리 at 2010/11/25 03:09 

넘 맛있게 잘 먹었어요.

먹는 건 순식간인데 만드는 사람 정성은 정말 끝도 없군요!!

단호박파이 먹고 싶던 타이밍에 잘 먹었습니다요.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5

앗 맛있게 드셨는지요 선생님ㅠㅠ 아무래도 크러스트가 좀 그렇죠? 다음에는 더 신경 써 보려구요. 지난 주에 레몬타르트 했고, 곧 사과파이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Commented by 쌤요 at 2010/11/25 16:42 

파이껍닥을 구울 때 위에 유산지를 깔고 무거운 것(누름돌이라는 것도 있지만, 콩 같은-)을

올려놓고 구워야 크기가 줄지 않는다 하더라구요!

저도 마트에서 북해도산 단호박은 보았는데,

맛이 훌륭하다하니 다음엔 사봐야겠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6 23:35

아 블라인트 베이킹 했어요. 그 문제라기 보다 제가 반죽 균형을 정확하게 안 맞춰서 그런 거에요. 버터에 물기도 많은 것 같구요.

 Commented by 푸디 at 2011/01/07 01:54 

초 싸구려체에 빵 ㅋㅋ 예전 고운 앙금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팥 한봉지를 불리고 삶아 껍질을 백프로 골라내고 체에 내렸던 무지막지한 미친 만주만들기가 생각나는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1/18 01:06

저는 그냥 좀 씹히는 게 좋아서 대강 거릅니다. 팥은 비싸고 만들기도 어렵고… 공들여도 표가 잘 안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