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어제는 아무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면, 오늘은 백만명을 만나 천만마디의 말을 한다. 말하자면 어제는 은둔자, 오늘은 영업사원처럼 산다. 그러다보니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정신을 못차리고 살게 된다. 어느 날은 말을 안 해서, 또 어느 날은 너무 많이 해서 정신을 못 차린다. 극단적인 수단을 통하지만 같은 결과를 얻으니 이 삶에 역설적으로 균형이 잡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정미소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오늘은 다른 때보다 모두 더 짜고 더 매웠다. 책을 세 권 들고 나갔는데 두 권을 입양보냈다. 남은 한 권을 다른 때보다 더 짜고 더 매운 저녁을 먹으면서 잠깐 읽어보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반으로 쪼개 하나는 책을 읽고, 다른 하나는 강변북로의 정체 상황에 대해 신경쓰라고 시켰다. 사실 책이 나온 다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 잠깐 펼쳐보니 의외로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과 문장 자체가 까마득하게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그걸 쓸 때의 시간이나 감정이 그렇게 느껴졌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오랜만에 펼쳐보니 행간에 어떤 기억이 숨어 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기억을 더듬는 작업의 기억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하나의 기억을 남기는 작업을 하면서 그 대가로 다른 기억을 제물 삼아 바쳤다고나 할까? 시간이 더 지나면 혹시, ‘아 그때 그걸 쓸때 이만저만(그간 출세 많이 하셨습니까?) 했었지’라고 기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기약이 없어보인다. 뭐랄까, 완전 진공이나 백지의 상태에서 그 책이 툭,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은 다른 때보다 모두 더 짜고 더 매웠다.
사실 그 책에는 빠진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걸 블로그에서 언급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였는데, 원고를 넘기면서 어쩌다가 빠뜨려서 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책이 잘 나가서 쇄를 넘기거나 재판을 찍거나 하면 넣게 되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도 같다. 그것도 한 30년 전쯤 벌어졌던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야기는 그냥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좋아했던 거라서 더 묻어두고 싶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간접적 또는 결과적으로 친절이 되는 행동이라면 어떤 경우 굳이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정확하게 모든 관계에서 균형이 맞게 되지는 않지만,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을 경우 더더욱 균형이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본능이 그렇게 이끌기 때문에 뻗어 나가고 있는 잔가지들을 적당히, 그러니까 조금 많은 비율로 쳐 내고 큰 줄기에 몰아주는 방향으로 가야만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분이 굉장히 나쁜 구석이 있다. 사실은 오늘도 별로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봐야 알아듣지 못한다. 그건 그들의 잘못도 아니다. 상황이라는 게 원래 그렇고 그렇다.
# by bluexmas | 2010/11/19 00:30 | Lif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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