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대설주의보>가 나온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또 산문집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주문했다.

그는 계속해서 늙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를 계속해서 언급하고, 평범한 삶을 극적인 순간이라 말한다. 늙어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대설주의보>에서 보여준 모습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소설이 아니고 산문이라서 그런지 더 개인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건, 적나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나라하기에 이 책에 실린 그의 글들은 너무 호흡이 짧다. 뭔가를 더 읽어내기 전에 글은 호흡을 마친다. 어떤 면에서는 요점만 전달하겠다는 의미가, 또 다른 면에서는 거기까지 읽어내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또 아니다.

가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답해야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를 좋아한다고, 더듬더듬 말한다. 어쩌면 나는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잘 하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특히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더 그런 것 같다. 어쨌든, 대개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면 그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게 된다. 요 며칠 전에도 그런 상황이 있었는데, 내가 뭐라고 그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 번 <대설주의보>를 읽고 생각보다 구구절절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의 소설에서 펼쳐지는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관계라…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건 정확하게 관계라기보다 ‘닿는 방식’, 아니면 ‘닿지 않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이 서로 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만의 닿는 방식이 결국 닿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정확한지 잘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그런 느낌이었다. 내 속을 깊이 더듬어보면, 나는 아마도 사람들이 닿을 거라고 믿어야 한다고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관계라는 것을 대하지, 실제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생각, 아니면 조금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다만 내가 그렇게 읽어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결국 그의 ‘댄디즘’을 좋아하는 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의 소설에는 바도 나오고 재즈도 나오고, 뭔가 아주 흔하다고 할 수 없는 맥주도 나온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그의 그러한 측면을 가장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디테일에 집착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장소 또는 지형지물을 도구 삼아 그 집착을 노출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경이 분산된다고 생각한다. 읽은지가 오래라 하루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좀 정확하지 않을 위험이 있지만, 그런 측면에서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대설주의보>를 읽고 쓴 글을 다시 들여다보면 쓸데없이 구구절절이 썼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결국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했던 이야기를 또 함으로써 글을 마무리짓고 싶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다음 장편이 기대된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에서 정리하고 또 <대설주의보>와 이 책에서 보여준 변화, 아니 보다 더 솔직히 말하면 노화-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닌, 그러나 부정적인 구석도 있기는 있을-가 어떻게 녹아날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실망할 가능성도 높아보인다. 그렇다면 그건 아마도, 그의 노화가 결국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또는 내가 변한 그를 이해할만큼 충분히 늙지 못해서, 그 둘 중 한가지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일단은 기다려보려 한다.

*사족 1: 솔직히 나는 책의 말미에 붙은 <독서일기>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을 채우기 위한 느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별개의 책으로 된 독서일기를 읽고 싶다.

*사족 2: 이 양반 아는 사람 있으면 그 손에 내 책 한 권 들려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by bluexmas | 2010/11/14 00:34 | Book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by 지노 at 2010/11/14 00:57 

윤대녕이란 이름에 흘깃 홀려 찾아왔습니다. 이 책을 사려고 맘은 먹고 있는데 선뜻 손이 안 가고 있었습니다. 님의 리뷰를 보니 구매해서 봐야겠군요. 저에게도 윤대녕은 댄디즘보다는 우울한 대학시절을 떠올리게 한 이름이었죠. 윤대녕을 읽기 위해선 여성성과 유랑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제게 이국치의 기호는 90년대 초반에 읽었던 하루키가 끝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와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소설이 <제비를 기르다>와 <대설주의보>였는데, 이 책도 그런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15 18:14

아 누가 그렇게 정의를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여성성’에는 동의하기가 좀 힘들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른 유형의 남성성이 곧 여성성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나라 남성의 남성성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여성성으로 무한수렴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글쎄요…

솔직히 한편으로 아주 팬이 아니라면 뭐야 이건? 할 구석도 있기는 합니다. 저는 그저 내 주면 고마워하는 열혈독자거든요.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11/14 08:22 

성석제의 <인간적이다>를 추천합니다.

(뚱딴지같이.)-.-;;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15 18:15

성석제도 한참 꽤 읽었는데 능글능글, 너무 징해서 어느 순간 읽기가 힘들어지던데요-_-

 Commented by sargasso at 2010/11/17 10:22 

윤대녕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석제를 좋아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이건 제 경우;;).

대학시절 환장해서 읽다가 한동안 놓고 지냈었는데 <호랑이는~>을 읽고선, 윤대녕이 늙었구나, 그런데 그게 꽤 괜찮은 듯 하다, 느꼈어요. 무한반복보다는 변화가 어쨌든 좋으니까요.

하루키와 윤대녕 중 저는 하루키를 더 좋아했었는데, 나이 들면서(제가 아니고 작가들이) 점점 하루키는 멀어져 가는 듯 해요. <대설주의보>도 아직 안 읽은 게으른 독자지만 bluexmas님의 글을 읽으니까 읽어야겠다 싶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22 11:26

하하 그런가요? 읽는 면에서는 다 재미있는데 성석제 소설이 더 현실 같죠. 그래서 징글징글한 느낌 때문에 읽다가 좀 지쳤습니다. 하루키는 정말 읽은지가 오랜데 최근에 해변의 카프카 영역본을 읽기 시작했어요. 영어로는 느낌이 어떤지 알고 싶더라구요.